성경 / 이사야 46 : 1 ~ 13
제목 /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잡혀 갔을 때 그들은 영적 회의에 빠졌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것은 바벨론의 신이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고민을 한 순간에 떨쳐 버릴 수 있는 놀라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손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하다면 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손에서 구원을 받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기 위해 계획하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고레스’라는 인물을 세워 그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사45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레스가 이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앞서 나가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고, 놋 문을 부수고, 쇠 빗장을 꺾어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바벨론의 우상을 넘어뜨리는 계획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바벨론의 두 우상의 이름이 나옵니다. ‘벨’과 ‘느보’입니다.
‘벨’ 은 바벨론의 최고신으로서 가나안의 바알과 같은 신입니다. 번영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재물을 주관하고, 성공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바벨론의 왕들의 이름에 벨이 자주합니다. ‘벨사살’ 왕도 이 신의 이름을 본 따 만든 이름입니다.
‘느보’ 는 벨의 아들로서 학문이나 문서나 천문학을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느부갓네살’ 도 이 신의 이름을 본 땄고,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 도 느보 신의 이름을 본 땄습니다.
벨과 느보를 섬기는 큰 신당이 바벨론 남쪽에 있었고 그 안에 돌로 만든 벨 신상과 느보 신상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신상의 높이가 5.4m나 되었다고 합니다.
절기나 큰 축제가 있으면 큰 수레에 거대한 신상을 싣고 도시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그 앞에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을 보면 벨은 엎드러지고 느보는 구부러졌다고 합니다. 우상이 엎드러지고 구부러졌다는 것은 바벨론이 정복을 당하여 그들의 신상이 끌어내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바벨론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이 몰락하면 바벨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무너짐을 통하여 바벨론의 몰락을 예언하심으로 예루살렘 귀환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벨과 느보’ 우상이 실려 나가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신들은 가축들이 모는 수레에 실려 나가고 있습니다. 가축의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전쟁에서 죽은 시신을 수레에 싣고 나오는 것과 같은 그런 모양새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하여 바벨론 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할 뿐 아니라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합니다.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사람들이 도금장이에게 비싼 금과 은을 주어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어깨에 메고 처소에 두고는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만 그 신은 서 있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고,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못하고, 고난이 닥쳐도 구하여 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만들 때 더 많은 돈을 들이면 더 큰 능력이 나타납니까?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면 그 우상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까?
우상은 우상일 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우상의 공통점은 죽은 우상이라는 점입니다.
부산의 해운대에 가면 해동 용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지난 번 근처에 식사를 하러갔다가 그곳의 경관이 좋다고 하여 잠시 들린 적이 있는데... 계단이 너무 많아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입구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입구에 교통 안전탑이 있었고, 득남불이 있었습니다. 교통안전을 빌고, 득남을 빌기 위해 세운 곳으로 보여 지는데... 득남불을 보면 배가 불뚝 나와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은 남아보다 여아를 더 선호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우습게 생각된 것은 배가 나온 득남불은 계속해서 아이를 낳지 않고 배가 부른 상태로만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득남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상은 만들기만 힘들지 나무 막대기만도 못합니다. 나무 막대기를 길을 갈 때 의지할 수 있지만 돌로 만든 우상은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것을 숭배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조폭들을 보면 그들의 두목을 섬깁니다. 두목이 등장하면 떡대 같은 사람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서서 배꼽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두목이 지시하면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행동합니다. 조폭두목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싸움꾼입니다. 치고 박고 싸우면서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입는 그런 싸움꾼입니다.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섬기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하고 그 우상에 매여 살아갑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은 돈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돈만 주면 그것이 해야 할 일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분간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합니다. 그러면서 돈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말합니다. 개처럼 돈을 버는 사람이 정승처럼 쓸 수 있을까요?
개처럼 벌면 안 됩니다. 창기처럼 벌면 안 됩니다. 불의한 돈을 벌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고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지금까지 돌보았고, 앞으로 돌볼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안아주고 업어주며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너희가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품어주고, 업어주고, 구하여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품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어려울 때 구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49:15절을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인이 낳아 젖을 먹여 키운 자식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고,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고 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빨래 짜듯이 짜면 무엇이 나올까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전 과정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여간해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채찍에 한 번만 맞아도 그 통증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고, 십자가에 달릴 때 못에 박혀 몸무게가 실렸을 때 그 고통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중간에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견딜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면 한 가지 경우입니다. 자녀를 대신해서 받는 것이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자신보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너를 낳았고, 안았고, 업었고, 품었다는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바벨론의 포로로 있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업고, 품으며, 구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품어주시고, 안아주시고, 어려움에 처할 때 구하여 주십니다. 언제까지요?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다시 언급합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에 있을 일을 알리고, 옛적에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보이면서... 내가 뜻한 그 일을 이루겠다고 하였다.”
이제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시겠다고 11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며,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2,13절로 가면 멀지 않은 날에 그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시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공의가 이루어질 날이 가까이 왔으므로 구원도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때는 공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돌이키고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진노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풀까요? 죄악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하나님의 진노는 끝나고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죄악을 숨기거나 해결하지 않은 채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죄를 돌이켜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고 정결해 지도록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죄 용서함 받고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날에 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풍성한 은혜를 원하십니까?
십자가 앞에 나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