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이사야 42 : 1 ~ 9
제목 /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붙드신 ‘종’ 을 언급하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할 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라. (읽음)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먼저, 이 본문이 말하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가 택한 사람’ 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다양합니다. 유대인 해석자들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어떤 사람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이스라엘, 어떤 사람은 이사야의 저자, 또는 고레스나 다리오 왕으로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해석은 ‘메시아’ 입니다. 1절에 나오는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다’ 는 표현은 이사야에서 메시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사61:1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눅4: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연관성을 가지고 볼 때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가 택한 사람’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1절 하반절에서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고 하였고, 3절에서도 하반절에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라고 하였고, 4절에서도 중반절에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4절이라는 짧은 구절 속에서 정의라는 표현을 3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가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그 분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정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실까요?
7절을 보십시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메시야가 미지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는 어둠의 세력들이 득세합니다. 이 어둠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숨깁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정책을 펴서 백성들을 속이고 무지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챙깁니다. 혹 진실을 밝히는 자가 있으면 입을 열지 못하도록 감금시키거나 제거합니다. 거짓으로 자신들을 미화시켜 영웅시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왜곡되고, 많은 사람들이 착취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면 진실을 보지 못했던 자들의 눈을 밝혀 진실을 보게 하고, 억울하게 갇힌 자를 풀어주어, 투명하고 밝은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정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제력이나 교육수준, 군사력, 예술·문화·기술·체육 분야에서도 아주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뒤쳐져 있는 것이 정치와 청렴도입니다.
지난 새벽기도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바로 의(義)입니다. 의로운 나라는 안전하게 존속시키지만, 죄악이 관영한 나라는 국력과 상관없이 심판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정의를 강조하시고,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일까요? 정의가 무너지면 반드시 피해자가 생깁니다. 정의가 무너졌다는 것은 공정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인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저울에서 추가 중심에 위치하지 않고 한 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손해 보는 쪽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신이 생겨나고,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깨닫고 소중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의가 구현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 고 하였습니다.
메시아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긍휼하시니 분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정복의 역사입니다. 힘 있는 나라가 약소국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에서는 정복자를 영웅으로 부각시키며, 이들의 정복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정복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고, 유린당하고, 인권마저 짓밟힙니다. 약소국 백성들의 눈물과 신음소리와 울부짖음은 역사책에는 가리어져 있습니다.
정복의 역사는 역사적 현실이지만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정복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영광을 차지한 자들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정복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메시아는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여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밝히시고, 상한 갈대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정복자들에 의해 꺼져가는 생명들을 살리시고 회복시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아픔을 느낍니다.
이 나라의 리더들에게서 정복자의 모습만 보일 뿐, 긍휼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더욱 크게 느낍니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많은 의혹들이 있습니다. 유가족들은 이런 사고가 왜 발생하였고, 충분히 구조할 수 있는 시간과 장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구조하지 않았나?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는 말만 반복해서 했지 밖으로 탈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300여명의 학생들은 배 안에 가두어둔 채 그대로 침몰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하여 유족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밝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를 그냥 덮고 지나려고 합니다. 유병언이 배를 불법 개조하여 무리하게 많은 짐을 싣고 운항하다가 발생한 사고이며, 유병언이 죽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더 이상 사건의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기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유병언과 세월호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근거보다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더 확실한데도 말입니다.
한편에서는 국가의 최고 권력기관 중에 하나인 국정원이 이를 의도적으로 사고를 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대한 증거 자료들을 내어 놓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투명하게 수사하여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면 됩니다. 그러면 의혹은 사라지고 정부는 다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을 여러 차례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로한 것은 긍휼의 리더십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정복자가 아니라 긍휼의 마음을 가진 리더십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긍휼의 리더십을 가진 분입니다. 그 긍휼의 마음으로 약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가지신 긍휼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기고 올라서고 차지하는 정복자의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격려하고 세우고 살려주는 그런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는 백성의 언약이 되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언약을 통해서 관계가 맺어집니다.
시내산 언약, 세겜 언약, 모압 언약과 같은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시대가 지나면 또 다시 반복되며 그 언약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계약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사명의 횃불도 넘어갔습니다. 이제 유다는 이름만 선민 이스라엘이지 실제로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를 통하여 백성과 언약을 맺을 것이며, 사명의 횃불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는 언약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에 구원의 빛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자신들을 구분시켜놓고, 이방을 향한 사명을 유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는 인류의 소망입니다.
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성행한 곳에 정의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힘 있는 정복자들에 의하여 유린되는 세계에서 상처 입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분입니다.
언약이 깨어지고 사명의 횃불이 옮겨진 상태에서 다시 언약을 회복시키고 사명의 횃불을 다시 가져오게 하신 분입니다.
이 메시야가 우리의 소망임을 알고 예수님과 함께 정의와 긍휼과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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