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이사야 39 : 1 ~ 8
제목 / 히스기야의 잘못
지난 시간에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15년 생명을 연장 받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소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에게 15년 생명 연장이라는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의 왕 ‘므로닥발라딘’ 이 사절단을 통해 글과 예물을 보내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보낸 사절단의 방문은 특별한 일입니다.
그들이 단지 히스기야의 회복을 축하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이 유다와 특별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한 가까운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단순히 회복을 축하하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목적이 므로닥발라딘이 보낸 글에 적혀있었을 것입니다. 그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히스기야의 쾌유를 축하하는 메시지와 더불어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제안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당시에는 앗수르가 위협적인 나라였습니다. 주변에 있던 모든 나라들의 최우선 과제가 앗수르를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견제 방법으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나라들끼리 동맹을 맺어 어떤 나라든지 위험에 처하면 서로 지원하여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므로닥발라딘이 보낸 글에 이런 우호관계를 맺자는 내용이 들어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2절을 보면 히스기야의 반응이 나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히스기야는 사절단의 방문을 받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궁중과 나라에 있는 모든 보물들,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 심지어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까지 다 보여주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행동은 유다의 국력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보입니다. 우호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합니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약소국가가 지원할 수 있는 규모와 강대국이 도와줄 수 있는 규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강대국 바벨론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자신들의 국력을 최대한 다 공개하여 이 일을 성사시키고자 했을 것입니다.
사절단이 오고 간 이후에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를 찾아가 사절단의 방문과 관련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그들이 와서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멀리 있는 바벨론에서 내게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궁전과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다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5,6절입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가 전하는 신탁의 내용은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날이 이르면 네 집에 있는 소유와 네 조상들이 지금까지 쌓아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탁이 내려진 것을 보면 히스기야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행동이 결국 바벨론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히스기야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사절단의 제안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한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강대국 바벨론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앞의 사30,3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남 유다가 B.C.701년 앗수르에게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이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남 유다는 애굽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나귀와 낙타의 등에 재물과 보물을 가득 실어 사신들을 특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유다가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러 간 이유는 애굽에는 말(馬)이 많고 병거가 많습니다. 당시에 병거와 마병은 최고의 군사력입니다.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애굽의 지원을 받으면 너끈히 앗수르 군대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나라를 도움으로 삼고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강대국을 의지하는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계를 보면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질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강대국을 등에 업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안전이 확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대국은 약소국의 안정을 보장해준다는 명분하에 약소국들로부터 상당한 이익을 챙깁니다. 약소국은 안전을 확보 받아서 좋고, 강대국은 실질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어서 좋고..
그러나 과연 이런 관계가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관계가 유지되려면 강대국은 군사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군사력이 약소국을 밑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소국은 강대국의 자본이 들어와 기반 시설에 투자하고 약소국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겨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요? 강대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더욱 강화되겠지만, 약소국은 계속해서 힘들게 일해서 남 좋은 일을 시켜주는 셈이 됩니다.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강대국을 의지하면 결국 그들의 손에 다 빼앗기게 됩니다.
이러한 국제 질서 하에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런 질서 하에서는 공의(公義)보다 힘이 앞섭니다. 세계가 공의가 아닌 힘에 의한 질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아무리 의(義)를 부르짖어도 힘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대국이라고 하여서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힘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의의 질서가 자리 잡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공의의 나라입니다. 사랑의 나라입니다. 평화의 나라입니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행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강대국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첫 번째 잘못이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 바벨론을 의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두 번째 잘못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보다 자신을 자랑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회복한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히스기야 시대에 국력이 신장되고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은혜입니까?
성경은 보면 히스기야가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습니다.
사절단이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을 자랑삼아 내어놓았습니다. 군사적 동맹을 위해 한 행동이라면 군사력만 보여주면 됩니다. 무기고애 있는 무기와 군대의 규모를 보여주면 됩니다. 이외에 궁중에 있는 보물들, 은금과 향유와 보배로운 기름을 다 보여주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자신을 가장 잘 어필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집이나 별장을 공개합니다.
대학교수와 같이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쓴 책이나 논문을 선물로 하거나 연구실로 초대하여 자신의 학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모임에 초대하여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히스기야가 사절단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보여주는 모습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자랑하기보다 자신을 자랑합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마치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룬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은혜의식이 있을 때 교만에 빠지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함을 잃지 않을 때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13권의 책을 쓸 정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만하기 쉽습니다.
목회자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교회가 성장하여 3천명, 5천명, 만 명, 십만 명 이렇게 모이면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13권의 성경을 기록하였으니 자신의 영적 권위를 내세우며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기에 육체의 가시를 주어 자만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교만한 자리에 머무르면 하나님은 베푸신 은혜를 빼앗아 가십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는 교만한 자에게는 은혜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자랑했던 모든 것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랑으로 삼을 때 그것은 다 날아가고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를 간구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간증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주신 은혜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귀한 은혜의 역사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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