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이사야 17 : 1 ~ 14
제목 /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의 심판 경고
바벨론과 앗수르 블레셋에 이어, 모압의 심판을 경고한 이사야는 17장에서는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다메섹은 아람(시리아)의 수도로서 다메섹은 곧 아람을 나타내고,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서 북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심판에 대해서는 이미 7~9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앗수르가 근동지역을 향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여기에 맞서기 위해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왕 ‘베가’가 동맹을 맺었는데 연합군을 형성하여 남유다의 ‘아하스’왕에게 동참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여기에 호응하지 않자 남유다를 위협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두 나라를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7장)
본장(17장)은 앞의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고 하였습니다.
다메섹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내용을 보면 북이스라엘도 함께 포함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놀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다메섹의 성읍이 무너져 무더기 더미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B.C.732년 다메섹을 무너뜨린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의 비분을 보면“르신의 아버지 벤하닷의 왕국 500성읍을 파멸시켜 쓰레기더미처럼 만들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수르에 의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다메섹은 매우 막강한 나라 중의 하나로서 제국의 위용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경고하신대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놀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아로엘’은 요단 동쪽 성읍들을 가리키는데 북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으로 다메섹의 심판에 이어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이어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며 아로엘이 어떻게 무너지게 될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양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놀아도 누구하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성읍을 누구하나 돌보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이 폐허가 된 채 방치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3절을 보면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이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롱하는 식의 표현입니다.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이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는 말은 4절 이하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같이 그 영광이 끝이 난다는 말입니다.
4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의 영광이 어떻게 될지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보여줍니다.
“그 날에 야곱(이스라엘)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실진 몸이 파리하리라”(4절)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살이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그런 운명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은 것 같으리라”(5절)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넓은 평지로서 곡물 생산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추수하는 사람이 곡식을 거두고, 그 후에 이삭을 줍는 자들이 와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데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운명이 추수 후의 논과 같이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황량한 곳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9절로 넘어가서...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옛 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꼭대기의 처소 같이 황폐하리라”는 말은 옛 적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던 수풀 속의 처소와 산꼭대기의 처소를 다 버려둔 채 도망하였다.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10절 중반절에서부터 11절을 보면 너희가 좋아하는 나무를 심되 이방 나라의 것까지 이종하여 심고, 그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잘 양육하였으나 심판의 날이 이르면 그 나무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수고한 것이 허사가 될 것이고, 아름답게 가꾸고자 했던 노력 역시 허사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12~14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날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민족들이 보일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소동하고, 큰 충돌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꾸짖는 순간에 그들은 바람 앞의 겨같이, 폭풍 앞의 티끌같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고 어떻게 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다가 아침이 오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무너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이 이런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10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민족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그들을 구원하여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고, 숱한 이방의 침입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셔서 모든 환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가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베푸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발로 차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였을까요?
자기 우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하기 보다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기 제국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주권자가 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떠나 어디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죄악의 길로 가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과 다메섹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욕망을 좇아 죄악의 길로 갔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메섹에 심판을 경고하면서 그들 중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감람나무 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를 흔들면 가장 높은 꼭대기에 달린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남게 될까요? 7,8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는 자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이나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않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심판을 받을 때 이스라엘의 몇몇 사람은 유다로 피난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유다로 피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리었습니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받았고, 자기가 만든 것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삽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루어놓으신 것을 바라보기보다 자기가 이루어놓은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것보다 자기가 이룬 것에 더 애착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것에 힘을 쏟기보다, 내가 이루기를 원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이룬 것에 애착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쏟은 곳에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것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 100년 200년이 지나면 어떤 것이 더 가치 있을까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모래성을 만들 때 더 아름답고 만들고, 무너지지 않게 만들려고 신경을 쓰면서 만듭니다. 그러나 그 모래성은 지나고 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와 모래사장은 그대로 남아 다음 세대들이 이곳에 와서 추억을 만들 것입니다.
내가 만든 모래성에 애착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해변입니다. 내가 만든 모래성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해변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 내가 만들고, 내가 이룬 것에 애착을 가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애착을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할 때 우리의 인생이 더 값지게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환난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우상화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구원의 능력이 되시고, 환난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양떼들의 수가 많음으로 인해 그의 종들이 싸우는 일들이 잦아지자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롯이 각각 자기가 갈 곳을 정하였습니다.
롯은 초목이 무성하고 양들을 치기 좋은 소돔성 가까이를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자기 소유를 선택하느냐? 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였고, 롯은 소유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롯은 가진 것을 다 잃었을 뿐 아니라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신앙을 가졌어도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느냐? 소유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다 선택하면 좋겠지만 실제로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소욕을 선택하면 소유한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다 잃어버리거나 세상 떠날 때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기 바란다. 하나님께 구원과 영생과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