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이사야 2 : 1 ~ 22
제목 / 희망의 세상를 이루려면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 시대에 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우상숭배가 깊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들이 개혁을 하고자 하지만 굳게 자리 잡힌 우상숭배를 뽑아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적 암흑시대를 살던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예언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뚜렷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유다 왕국의 현재와 미래입니다.
현재의 유다는 영적 부패의 극치를 이루고 있지만 유다의 미래 모습은 영적인 영광의 극치를 이룹니다.
본문 6-9절은 유다 왕국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유다 왕국의 현재 상황은...
동방 풍속이 가득하여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점을 치고,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고 언약합니다. 금은보화가 가득하고 말과 병거가 많지만, 또한 우상도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기보다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경배합니다. 천한 자도 귀한 자도 모두가 우상 앞에 굴복합니다.
이 시대를 다섯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미신, 사대주의, 물질숭배, 무력강화, 우상숭배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어느 시대의 국가든지 타락하기 시작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6절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유다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전 586년에 유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을 당할 때 위용을 자랑하던 솔로몬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미래에 다가올 이스라엘의 모습을 2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말일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 위에 서게 됩니다. 열방의 많은 백성들이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릅니다. 백성들은 시온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합니다.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무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져서 전에 있던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를 치거나 전쟁을 연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일(종말)에 이루어질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신앙의 바른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 시대처럼 잘못된 길을 가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종말에 회복하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꿈꾸며 이루어야 할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첫째로, 우리가 꿈꾸며 이루어야 할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입니다.
2절을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일에 이루어질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서며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이 시온 산은 하나님의 전이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선다” 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모든 통치권보다 뛰어날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왕들을 다스리며 모든 나라를 다스릴 것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의로우며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할 때 이상적인 나라가 건설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통치자들이 있지만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통치자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거나 백성들의 행복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더 강한 힘을 거머쥐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무소불휘의 권력을 손에 쥐고,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독재가 나오고, 억압이 나오고, 착취가 나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이들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 이들을 쥐어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를 보호하십니다. 모든 자들을 동등하게 대하시며,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심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착취를 당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가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통치가 확장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을까요?
3절을 보면 하반절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말씀대로 행하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이상적인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꿈꾸며 이루어야 할 세상은 자기 우상과 자고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표현하며 강조하고 있는 겄이 있습니다.
11절, 17절을 보면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 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12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고 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가 ‘hubris’ 입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날에 눈이 높은 자를 낮추시며, 교만한 자를 굴복하게 하십니다.
교만하고 자고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가 올라서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밟아야 합니다. 이것 자체가 불의입니다. 세상을 병들게 만듭니다.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나를 높이고 내가 올라서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높여야 할 분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고 경배를 받아야 할 분입니다.
오늘 새벽시간에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치료받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갈 때 어떤 모습으로 갔습니까?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군사들을 행렬을 지어 갔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얼굴도 보이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혼자서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거와 군사들을 대동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이런 모습으로 가면 안 됩니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나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는 겸손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요단강에서 7번 몸을 씻으라고 한 이사야의 말에 나아만 장군이 이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자존심을 내세워 그냥 집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존심을 꺾고 엘리사가 지시한 대로 따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이사야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교만한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높임 받고, 내가 올라서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버려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홉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호흡에 달려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못 됩니다. 사람은 3분만 숨을 쉬지 못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1주일간 물을 먹지 못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40일간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이런 연약한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는 마치 연약한 갈대를 지팡이처럼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돈 있는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의지합니다. 줄을 잘 서는 것이 출세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사람을 의지하려는 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득보다 실이 더 많습니다. 도움을 받기보다 이용당할 확률이 많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높일 때 하나님께서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상적인 희망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을 섬깁시다.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릅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희망의 세상, 기쁨의 동산을 만들어 우리로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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