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이사야 1 : 1 ~ 31
제목 / 하나님의 회복의 방법
이사야는 크게 둘로 나누기도 하고 셋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면 1~39장, 40~66장이다. 신구약 성경의 구조와 흡사합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면 1~39장, 40~56:8, 56:9~66장입니다.
1~39장은 이사야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고, 40~56:8절은 바벨론 포로를 배경으로 하고, 56:9~66장은 포로에서 귀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1~6장은 이사야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늘 법정의 장면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이 법정을 여시는 이유는 유다백성들의 죄악을 밝히고, 징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징계는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징계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데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1절에서 이사야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사야’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이사야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외국의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름과 이사야서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유다왕 아마샤의 형제라고 추정 하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사야는 왕궁에 드나들고 왕과 고관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선지자였고, 왕의 행적을 기록할 만큼 왕과 가까이에서 지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가 나옵니다.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통치 할 때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표현방식이 법정에서 증언을 하듯이 하나님이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진술이 나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은 나를 거역하였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자식과 같이 양육하였으나 이스라엘은 나를 거역하였다고 말씀합니다.
3,4에서 하나님은 거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소를 키워보신 분들이 계시기에 잘 알겠지만 소와 나귀는 우둔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누군지는 압니다.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보다도 못하여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렇게 양육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거역하였습니다.
4절을 보면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며,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멀리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6~9절을 보면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겪게 된 징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합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졌고, 매를 맞은 흔적뿐이다. 그럼에도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
“땅은 황폐하고 성읍들은 불에 타고, 토지는 이방인에게 빼앗기고, 이제 예루살렘만 경우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같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하나님이 생존자를 조금이라도 남겨두지 아니하였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배반한 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죄 중에 하나가 은혜를 배반하는 죄입니다.
은혜를 배반하는 것은 패륜적인 범죄입니다. 자식을 사랑으로 정성을 다하여 키웠는데 자식이 자라 부모를 멀리하고 외면한다면 부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이런 상처를 주는 자식은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 이 사회가 이런 죄를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습니까?
부모를 부양하려는 자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결혼하고 나면 독립을 선언하고 부모의 곁을 떠납니다. 이후로 부모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갑니다.
이런 죄는 비단 자식들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사야 시대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우리가 얼마나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한국 교회 초기의 모습과 비교해 본다면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채찍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희망촌교회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가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남은 자의 대열에 서야 합니다. 세상에 어두움이 짙게 깔리고 더러운 죄악의 냄새가 코를 찌를 때 하나님은 심판의 칼을 드십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를 정리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남은 자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드십니다. 우리 희망촌교회 성도들은 심판의 칼날에 사라지지 말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남은 자의 대열에 설 수 있기 바랍니다.
11~15절을 보면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을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말씀합니다.
11절 –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12절 – 얼굴만 내미는 예배를 마당만 밟는 헛된 예배이다.
13절 – 헛된 제물을 가증히 여기며,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14절 – 월삭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이다.
15절 – 손을 펼 때에 외면하고, 기도를 듣지 아니하겠다.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예배, 헌금,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가증이 여기십니다. 이런 종교적 행위는 무의미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씻는 것입니다. 악한 행실을 버리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풀고, 정의를 구하고, 학대 받는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과 공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율법 시행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사랑의 법을 이행하는 것을 고아와 과부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가를 가지고 판단했고, 공의의 법이 이행되는지는 재판이 공의롭게 이루어지는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사랑과 공의를 행하지 않고 종교 행위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자주 드리고, 많은 예물을 바치고, 수없이 기도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어려운 자를 외면한다면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허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가 응답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이 축복의 예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기에 대하여 자신 있게 아멘이라고 할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깨끗한가? 나는 정의를 구하고 있는가? 선을 행하는가? 어려운 이웃에 대하여 참 이웃으로 책임을 다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들 중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에 빠져있든지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을 회복시키실 때 2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공의의 심판이시고, 하나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죄악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서는 평안과 행복은 없습니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무시하는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며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을 공의롭게 행하지 않으면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시면 불편해 하십니다.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서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과 구속의 은혜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23,24절을 보십시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도둑과 짝하고, 뇌물을 사랑하고, 예물을 요구하고,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굽게 하는 패역한 고관들에 대하여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하리라”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행사하여 패역한 자와 죄인과 여호와를 버린 자를 패망하고 멸망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25,26절에 나옵니다.
이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찌꺼기 같은 세력들과 혼잡물을 제하여 이 세상을 청결하게 하여 의롭고 신실한 곳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은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땅 시온은 하나님의 정의로 구속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돌아온 자들도 공의로 구속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돌아온 자들” 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돌아오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어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온갖 비리와 부조리, 거짓과 폭력으로 얼룩져 추한 냄새로 가득한 죄악된 세상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공의로운 심판의 막대기로 패역한 자들을 쳐서 이 세상의 더러운 세력을 제하시고, 또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돌아오는 자를 새롭게 하시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실 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구속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회개할 때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구속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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