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히브리서 10 : 1 ~ 10
제목 / 그리스도의 제사
우리가 늘 고민하며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입니다.
수없이 많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배가 아니라면 우리가 드리는 수많은 예배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오늘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예배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이 드리신 제사와 비교하며... 참 제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 이며 ‘참 형상이 아니다’ 고 합니다.
1절에서 말하는 ‘율법’은 제사 제도와 관련된 모세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1절은 구약의 제사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며 ‘참 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림자놀이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촛불 앞에 어떤 물건을 놓고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놀이입니다. 실제 물건을 보여주지 않고 그림자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림자만 보고도 실제 문건이 무엇인지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이 때 그림자는 실체의 모양을 그림처럼 보여주지만 그림자가 실제는 아닙니다. 그림자는 단지 실체의 모양을 그림처럼 보여줄 뿐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1절 중반절에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제사의 방법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구약의 제사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하게 한다면) 그들을 단 번에 정결하게 하여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나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겠느냐?
이 질문은... 계속해서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않느냐? 는 말입니다.
넘어가서 4절을 보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고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구약의 제사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소와 염소를 드리는 구약의 속죄제사는 양심과 마음과 영혼을 영원히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제사를 통하여 육신을 정결하게 할 수 있으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는 완전히 무용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구약의 제사를 정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죄를 속죄하는 원리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시간 레17:11절을 통하여 ‘피’가 지니는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 피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바로 이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과거에 지은 죄를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3절을 보면...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다” 고 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 자신들이 왜 이 제사를 드리는지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지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었겠지요.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는 유익이 있습니다.
세 번째, 죄가 얼마나 끔찍한 심판을 불러오는지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양과 염소가 피를 쏟고 죽는 끔찍한 장면을 봅니다. 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실은 저 자리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이를 보면서 죄의 형벌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지를 느끼며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제사가 지니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도 또 다시 죄를 범합니다. 제사와 더불어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죄를 범합니다. 구약의 역사가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림자의 실체인 ‘장차 올 좋은 일’, ‘참 형상’은 무엇이며, 그림자와 어떻게 다를까요?
이에 대해서는 5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5~7절을 보면... 시편 40편을 인용하여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을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이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제사와 예물”입니다.
무엇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합니까?
“번제와 속죄제”입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을까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부정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이해하려면 구약에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몇 가지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삼상 15장을 보면... 사울과 사무엘 사이에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왕을 불러 하나님이 명령하신 내용을 전달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사울은 이 전쟁을 수행하여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며... 그가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은 사울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원하시는 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원하고, 순종 없는 제사는 원치 않으십니다.
미가서 6장에서도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고, 이것이 없는 천 천의 숫양,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맏아들, 내 몸의 열매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고, 회개치 아니하는 제사, 통회하는 심령이 없는 번제는 원하지 않습니다.
본문5~7절에서 말씀하신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고,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 제사 행위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온갖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제사와 예물은 열심히 드렸습니다.
이들이 왜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일에 열심이었을까요?
제사와 예물을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온갖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삶과 예배가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순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유대인들에 비해... 예수님은 참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예수님은 순종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순종의 제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감당하셨을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요4: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고, 그 결과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제사를 드리심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고,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근본적인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는 예수님이 드렸던 순종의 제사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순종 없는 제사와 예배는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 제사를 드려야 한다.’ 입니다.
바울은 롬1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거룩함을 입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구별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바로 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에 자신을 한 번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예배를 드렸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 없이 형식적인 예배를 반복적으로 드려오지는 않았습니까?
예배를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그 생각만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이후로 여러분의 예배가 달라지기 바랍니다. 순종 없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산제사, 영적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제사이며, 산제사입니다.
이 예배가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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