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히브리서 9 : 11 ~ 14
제목 / 그리스도의 피
지난 시간 히브리서 기자는 옛 성소와 하늘 성소를 비교해서 보여준 바 있습니다.
옛 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만남이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옛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어 돌아가셨을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막혀 있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 이곳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과 권능을 힘입어, 하나님 맡기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오면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피’에 대하여 혐오스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의 몸에서 흘린 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간혹 사고가 발생하여 유혈이 낭자한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돌립니다. 그 이미지를 아예 머릿속에 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모습을 직접 보았다면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에 대하여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는 것조차 싫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는 연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로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피로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12절을 보면 예수님의 피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입니다.
구약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13절에서 설명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염소와 황소의 피”는 속죄 제사의 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땅도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수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로 제단에 바르고, 제물은 화제로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들의 죄를 사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리는 행위’는 정결의식입니다.
시신을 접촉하게 되거나 부정한 사람이나 부정한 것에 접촉한 자가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면... 붉은 송아지의 재를 타서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듯이 9절을 보면... 구약의 장막에서 드렸던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는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는 효력은 있었으나 근본적인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도 또 다시 죄를 범하는 일을 반복하여... 속죄제사도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양심을 정결하게 합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요?
14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 고 합니다.
속죄 제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이...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있는 것은 제물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서 33년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의(義)로도 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완전한 속죄제물의 조건을 갖추시고, 우리 인간의 죄짐을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이 반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는 오고간 모든 세대들의 생명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주만물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 창조된 것이 없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어느 것이 더 가치가 큽니까? 예수님의 생명을 무한한 가치가 있기에 예수님의 희생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했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무효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예수님이 혼자서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하신 일입니다.
마1: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님의 탄생 전에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실 것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 제사는 우리 인간의 육신의 죄 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죄까지도 감당하셨습니다. 구약의 속죄 제사는 영혼의 죄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죄만 해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죄 제사를 드리고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영적인 죄까지도 짊어지셨기에 우리의 영혼이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글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고, 또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큰 두려움과 슬픔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큰 고민에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민은 단지 앞으로 겪으실 십자가의 육신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형벌로 인한 고민이었다. 예수님은 육신적 고통은 얼마든지 감수하실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의 고민은 인간들의 영의 죄를 짊어지셔야 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영적 죽음의 고통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많은 분들이 일제의 심한 고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외치다가 죽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분들이 두려워한 것은 육체의 고통을 주는 고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고민하고 두려워한 것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육신의 편안함보다 독립을 주장하는 길을 선택했고, 신사참배 거부를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민에 빠지시고 두려워하신 것은 육신의 고통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인 죄까지 짊어짐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단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늘이 어두워진 것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의 죄까지도 다 감당하셨기에 우리의 영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까지도 새로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 중반절을 보면...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양심의 죄에 대하여 별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법률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양심의 문제를 놓고 잘잘못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어긋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양심을 거슬리는 일을 하고나면 그 때부터 양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 자신이 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구지 바르게 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상태가 되면 의를 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죄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의보다 죄를 더 좋아합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합니다.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보다 악한 일을 즐깁니다.
양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의 삶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양심을 새롭게 하고 양심의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으로 지은 죄, 입으로 지은 죄, 몸으로 지은 죄, 영적으로 지은 모든 죄를 사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을 새롭게 하여 양심을 거슬리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과 양심의 깨끗함을 입어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마음과 양심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것은 없습니까?
마음과 양심의 깨끗함을 얻고 자유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혼자서 반성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아야지 결심한다고 하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죄로부터 씻음을 받아 마음과 양심의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죄의 은총을 입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4절 하반절을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모든 죄에서 구속하여 의롭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계1:5,6절을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고 하였습니다.
벧전2:9절을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등대를 밝혔듯이...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세상에 비추어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향을 피웠듯이 우리도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중보기도의 향을 피워야 합니다.
제사장이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행복에 필수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본분에 충실할 때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이유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거룩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고,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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