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디모데후서 3 : 6 ~ 9
제목 / 어리석은 여자
지난 두 주에 걸쳐 말세에 나타날 현상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19가지입니다.
1) 자기 사랑 2) 돈을 사랑 3) 자기 자랑 4)교만
5) 비방 6) 부모 거역 7) 감사하지 않음 8) 거룩하지 않음
9) 무정 10) 원통함을 풀지 않음 11) 모함 12) 무절제
13) 사나움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음
15) 배신 16) 조급 17) 자만 18) 쾌락을 하나님보다 사랑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
5절 하반절을 보면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19가지 현상은 말세가 다가올수록 이 세상은 점차 세속화 되어감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더욱 세속화되어 간다 하더라도 세속의 물결이 교회를 물들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세상의 문화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5가지로 구분하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2) 문화의 그리스도
3) 문화 위의 그리스도 4)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니버는 5가지 유형들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변화시키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문화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이를 부정하거나...
또는 세상 문화와 결별을 선언하고 수도사처럼 세상문화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지키려 하거나...
세상 문화에 동화되어 세상문화의 흐름을 따르거나...
세상 문화를 교회의 권위로 지배하려는... 이런 입장은 부분적으로 타당성이 있으나 바람직한 입장은 아닙니다.
세상 문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앞에서 열거했던 19가지는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음향시설, 영상, 전자기기, 악기... 이런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 활용해야 할 도구들입니다.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입장은
세상 문화의 흐름을 주시하며 부정적인 측면은 제거하고 바로잡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은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저속하고 퇴패적인 문화가 퍼지는 것을 지켜만 볼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건전한 생활 문화를 보급하여 좋은 문화의 토양을 만들어야 합니다. 문화가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큽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선교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교회들이 문화선교에 힘을 쏟고 있지만 아직 여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많은 교회들이 여기까지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보급을 위하여 기독교 영화, 뮤지컬, 연극, 각종 퍼포먼스 등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기독교의 문화를 만들어 보급하고, 건전한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라든지, 또는 교우들과 친구들, 이웃들과 모임을 가질 때 어떻게 지내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며 유익하고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오면 바울은 “어리석은 여자”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어리석은 여자’는 헬라어로‘귀나이카리아’라고 하는데 분별력이 없어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넘어가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에베소 교회에 있는 이 어리석은 여인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들 중에’ 라는 말은 앞에서 열거했던 말세의 현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 유인할 때 이 여인들이 그들의 말에 넘어가 잘못된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했는데 이들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듣다가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주관이 있습니다. 그 주관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우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주관이 올바르고 뚜렷하게 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데, 주관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맞는 지 틀린 지 분간하지 못하고 쉽게 주관을 바꿉니다. 이 때 잘못된 주관이 들어가면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본문을 보면 유인하는 자들에게 넘어간 여인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세속에 물든 사람들을 가까이하다보니 점점 더 죄가 쌓여갔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특별히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아니한 사람일수록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가끔 이전에 아주 순진했던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순진한 사람은 나쁜 영향도 쉽게 받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사람, 착한 사람은 바람직하지만 순진한 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은 못 됩니다.
세속문화를 즐기고,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쉽게 범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동화되어 똑같이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내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혹 잘못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어리석은 여인은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악된 본성 중에 하나가 욕심입니다. 욕심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 욕심에 이끌려 죄를 짓게 됩니다.
약1: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은 그 욕심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욕심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알고, 욕심을 채우면서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욕심이 성령을 소멸시키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거룩한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라.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이 여인은 아무리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자신의 관념을 말합니다. 그 선입관이라는 눈을 가지고 사물과 사건을 보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시각으로 봅니다.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하고 가르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곡해하고 삐딱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이 여인은 세속의 사람들에 의해 잘못된 주관, 잘못된 선입관이 형성되어 버렸기에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구원의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고,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세상은 속고 속이는 곳이다. 어떻게 하든 돈만 많이 벌면 된다.
내가 누구인지는 돈이 말해 준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구원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이들에게 진리의 지식은 돈이 안 되는 무용지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쳐도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이 여인은 진리에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구원의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름은 이 본문에만 나오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탈굼이나 외경, 기독교 초기 문헌에 자주 나오는 이름입니다. 이들은 모세가 바로 앞에 가서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바로 앞에서 몇 차례 똑같이 마술을 부렸던 사람들입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행동이 점차적으로 더 깊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유인 되어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점점 죄가 쌓이고 욕심에 이끌리는 자가 되고, 그 후 구원의 진리에서 떠나게 되고, 이제는 진리를 대적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가 되어버렸고,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마음이 부패하였으니 이들의 말과 행동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이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유인하는 자들에 의해 잘못된 곳에 발을 디디게 된 결과가 엄청나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첫 발을 잘못 디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 여인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첫 발을 잘 디뎌야 합니다. 그리고 어긋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다른 이야기들로 유인하면 과감하게 뿌리치고 나와야 합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작은 틈을 허락하면 그 틈이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저 두 사람”은 앞에서 말한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대적했던 애굽의 술객들은 열 가지 재앙에서 두 번째 재앙까지는 흉내를 내었습니다. 마술을 부려 물을 피로 만들기도 하고, 개구리가 올라오게도 하였습니다.(출7,8장)
그러나 세 번째 재앙인 티끌이 이가 되게 하는 재앙에서는 술객들이 흉내 내지 못하고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출8:19)
그리고 여섯 번째 재앙인 독종이 내려졌을 때에는 술객들도 독종이 걸리고 말았습니다.(출9:11)
이와 같이 어리석은 여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있어도 결국에는 늑대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드러내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성을 가다듬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 영성 훈련은 겉모양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경건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훈련의 본질은 내 본성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까지 성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며,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있을 때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벧전1:7절을 보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예수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오락가락하지 마십시오. 믿음에 관련해서는 순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유인하는 말에 넘어가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주의 말씀을 따르면 주님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세속의 미혹에서 자신을 잘 지키고, 주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을 따름으로 마지막 승리를 거두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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