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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생명 (요한복음15:1~8)
백종선 2025-02-03 추천 0 댓글 0 조회 80
[성경본문] 요한복음15:1-8 개역개정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구원의 생명

성경 / 요한복음 15 : 1 ~ 8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살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생명(영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생명(영생)이 있을 때 복의 근원으로서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타 종교는 기복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자기 욕망을 이루고자 합니다. 쌀을 짊어지고 절에 가서 절을 하고, 비싼 돈을 들여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화를 물리치고 복을 얻고자 함입니다. 원화소복(遠禍召福)입니다.

타 종교가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은 선행을 가르칩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요소가 있습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합니다. 고행이나 수행을 통해서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고등종교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할수록 이를 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행하지 못할 때 괴로움이 큽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선한 삶을 요구하면 부담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수행이나 고행과 같은 이런 방법으로는 자신도 살리지 못하고 이 세상도 살리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 한계에 빠져 고민하며 탄식하다 끝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고전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말씀합니다. 이 생명이 자신을 새롭게 하고, 이 생명이 있을 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죄악으로 무너진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감당합니다.

 

구원의 생명은 인간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수련에 증진하여 이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를 깨달아 갖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주십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은 모든 만물의 출처와 지나온 역사의 과정과 앞으로 펼쳐질 일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을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거대한 우주를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생명 있는 동식물 역시 하나님에게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 역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출처입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완전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놓았습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광스러운 인간은 자기 수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스스로 이룬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여 타락함으로 영광스런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과 세계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면 인간은 타락하고 영광스런 모습을 상실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 세계도 인간에 의해 그 아름다운 영광을 잃어버리고 파괴됩니다.

타락한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사랑과 선과 의를 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온갖 죄를 범하면서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야수와 같은 야만성을 드러냅니다. 타락한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치안이 약한 나라에서는 어김없이 범죄율이 높습니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법질서가 무너지면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됩니다. 인간의 야만성을 전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약소국을 침입하여 주권을 빼앗고, 재산을 수탈합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자비한 살인이 자행됩니다. 재산을 약탈합니다. 인간을 위협하며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갑니다.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이로 인해 가정이 깨어집니다. 전쟁의 참혹상은 표현하기조차 힘들 만큼 참혹합니다. 또 하나의 사례가 노예제도입니다. 강제로 잡아 데려와서 짐승처럼 일을 시킵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30년간 노예폐지 운동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저항과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막으려는 사람을 비난하고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체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비극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비극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식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만행을 막으려고 법을 만들고, 공권력을 만들고,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사회적 규범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기울임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런 인간과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이런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법을 만들고,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죄악으로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생명을 다시 회복할 때 영광스런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누가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을 회복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로운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런 인간으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하려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공부할 때 문제를 풀며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실력을 쌓을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체력이나 기술에 있어 약점을 보완하여 자신의 능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런 방식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이를 잘 간파한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7:18절 이하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합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자신에게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탄식합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타락한 옛사람은 죽고, 예수님이 주신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 생명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는 생명력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어떻게 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말씀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를 비교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생명이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르고 썩어 소멸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생명이 있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열매를 맺고 맺지 못하고 합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나무에 붙어 있느냐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깨우치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며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살아있는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죽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과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을 놓고 보면 외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똑같이 호흡하고 똑같이 음식을 먹고, 똑같이 활동합니다. 하지만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꽃과 같은 화려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봄철에 꽃이 핀 것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꽃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렇게 꽃은 화려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봄철에 잠깐 피었다가 떨어집니다. 지는 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의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소멸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습니다. 이들 중에 수많은 사람이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소멸합니다. 잠깐 동안 꽃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사라집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삶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열매가 있습니다. 헌신의 열매가 있습니다. 섬김의 열매가 있습니다. 구원의 열매가 있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죽음과 함께 소멸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립니다.

생명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자랍니다. 성장합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놀라운 신비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을 때 영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나무와 같습니다. 죽은 나무에 아무리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영적인 변화와 성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은 나무 가지에 불과합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에게 이 생명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생명이 있으면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만약 영적인 성장이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과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뛰어나고 특출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명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중요한 건 예수의 생명입니다.

요일5: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고 살립니다. 구원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소멸합니다. 자신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살리지 못합니다. 생명의 길로 가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갑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을 때 내가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이 땅을 살리는 구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희망촌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 안에 가하며 예수님의 생명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멸망으로 향하는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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