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말씀과기도 >
  • 주일낮예배설교
생명의 주를 따르라 (요한복음10:10)
백종선 2025-02-10 추천 0 댓글 0 조회 73
[성경본문] 요한복음10:10 개역개정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생명의 주를 따르라

성경 / 요한복음 10 : 10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을 만큼 완전했습니다. 기쁨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고, 사랑의 교제가 있었고,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심히 아름다웠던 세계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가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이 있습니다. 폭력과 살인이 있습니다.

이런 불행을 가져오게 한 아담의 범죄가 무엇인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단순히 선악과를 따서 먹은 그 행위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열매를 먹는 과정에서 마귀가 노린 것이 무엇인지 이 점을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가 아담을 미혹하여 넘어뜨린 결정적인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이것을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죄를 범하지 않고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심히 좋고,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고,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한 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네가 선악을 분별하여 네가 결정한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너 중심으로 너가 판단해서 너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엄청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계를 허무는 핵폭탄과 같은 겁니다.

 

모든 것의 중심을 나에게 두는 것 자기 중심성이 모든 죄악이 자라나고 확대되는 뿌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위주로 판단하게 됩니다. 자기입장에서 판단합니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객관성이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자기 유리한 방향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국가에 법이 있습니다. 국가법이 공정할까요? 국가 질서를 세우고, 공의를 실현하고자 법을 만들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왕조시대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는 신분제도가 정당합니까? 부당합니까? 당시에는 이것이 법이었습니다. 노예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도 노예제도가 법이었습니다. 왜 이런 부당한 법을 만들었을까요? 자기 중심성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중심에 두면 이런 불공평한 법을 만들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공평한 법을 만들고자 노력하여 많이 개선되긴 하였지만 모두가 만족하는 법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도 공공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법을 지켜야 합니다. 중요한 국민의 의무입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겉잡을 수 없는 더 큰 혼란을 초래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에게는 자기 중심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이런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셸데루프 에베(T. Schjelderup Ebbe)라는 생물학자가 닭들 사에에도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교육관 옆에 농장에도 닭을 키웁니다. 강사장님이 닭들 사이에도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보니 서열 두 번째 닭이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닭이 있었는데 서열 첫 번째 닭이 등장하면 괴롭히는 행동을 멈추고 숨었습니다. 닭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들도 서열이 있습니다. 사자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고, 늑대, 개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습니다. 힘이 강한 놈이 집단을 지배합니다. 암놈을 차지하여 자기 종자를 번식시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힘이 약해지면 다른 힘이 강한 놈이 등장하여 집단을 지배합니다. 이때부터 힘이 약해진 서열 1위는 찬밥 신세가 되고, 집단에서 쫓겨납니다.

인간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도 힘의 질서가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힘은 무력과 돈과 지식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우위를 점하고 힘이 없는 사람은 아래에 위치합니다. 갑을관계가 형성되고 이로 인해 불공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합니다. 강자가 많은 것을 차지합니다. 이로 인해 힘이 없는 약자들은 고통을 겪고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타락하여 자기 중심성을 지닌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웁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높아져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온갖 죄가 발생합니다. 자기가 살려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약탈과 착취를 일삼습니다. 자신이 높아지려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립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면 살리는 자가 아니라 파괴하고 죽이는 자가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도둑을 비교하며 그 차이점을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고, 예수님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자가 있습니다. 약소국을 약탈하고 전쟁을 일으켜 무너뜨리는 악한 국가이 있고 힘으로 약자를 제압하고 이들을 부리고 이용하는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이들이 가진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들은 힘 있는 강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물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힘 있는 강자가 세계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강자에 의한 세계 질서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힘 있는 자 앞에서 굽신거리고, 힘이 없는 약자들 앞에서는 군림하며 지배하려 합니다.

 

자기 중심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공의와 공정, 공평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뜻이 없습니다. 자연환경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세상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만족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중요한 기업의 정보도 외국에 팔아넘깁니다. 국가를 말아먹더라도 자기 이익을 챙깁니다.

 

이런 죄악의 본성은 타락한 인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힘을 갖게 되면 이 본성이 살아납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가부장적인 가정이었을 때 남편에게 힘이 있었습니다. 이때 남편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내를 힘으로 제압하고 종처럼 부렸습니다.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군대에서 고참이 되면 하급자에게 이런 성향을 드러냅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지위에 오르면 하위직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성향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힘이 없어 이런 본성이 잠재되어 있을 뿐이지 힘을 갖게 되면 숨어 있던 야수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자가 되지 못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자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인간성은 파괴되어 야수처럼 되어 버리고, 이 세상은 점점 지옥과도 같은 곳이 됩니다.

 

타락하여 멸망으로 향하는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하반절을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시려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자기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고, 풍성한 삶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이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셨습니다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입어 죄에서 구원을 받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 사랑과 의와 거룩함으로 옷 입고,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입어 거듭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생명의 주를 따라야 합니다.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처럼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주를 따라 살리는 자로 살아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하고 바라느냐에 따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 정해집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하면 생명의 주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간절히 바랄 때 생명의 주를 따라 살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에덴과 같은 완전한 나라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약육강식과 같은 힘의 질서가 없고,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가 함께 뒹구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하고 베푸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는 상상만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소망할 때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이 유익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이 영광스러운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높은 권력을 차지하는 겁니까?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의 삶이 영광스럽습니까? 물질적으로 부한 자가 되는 겁니까? 물질의 많음이 영광과 직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욕심 많은 부자의 삶이 영광스럽습니까? 돈 쓰는 것을 벌벌 뜨는 부자가 영광스럽습니까?

영광스런 삶이 되려면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의미 있는 삶인가? 품격있는 삶인가? 아름다운 삶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하고, 유익을 끼치고,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자로 살아갈 때 영광스런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말에 능력이 있습니다. 18: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고 합니다.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칭찬의 말, 격려의 말,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 사랑의 말은 살리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힘을 얻고 자신감을 얻고 살아납니다. 부정적인 말, 불신앙적인 말, 비난의 말, 불평 원망의 말은 죽이는 말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고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교회에 새로 부임하여 보니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과 잘못을 이야기하고,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교회가 화평할 수 없고, 새가족이 와도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교회 불평록이라는 노트를 만들어 놓고 불평할 말이 있으면 기록하고 기록하기 전에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트에 기록할 때는 누가 기록하였는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목사님이 40년을 목회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그 노트에 글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떳떳하지 못한 말은 삼가고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생명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4:23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이 펼치신 사역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가르치셨습니다(Dicache).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Kerygma).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Diakonia).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는 생명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생명의 사역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전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가르치며, 이 땅에 가난하고 병든 영혼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쳐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땅의 소망은 교회에 있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리는 자로 살아갈 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타락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고 생명의 주를 따라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자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성도의 사귐 (요한일서1:3~4) 백종선 2025.02.16 0 68
다음글 구원의 생명 (요한복음15:1~8) 백종선 2025.02.03 0 78

63082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앵지밭골1길 59-25 (회원2동 740-1) TEL : 055-247-7328 지도보기

Copyright © 희망촌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9
  • Total63,489
  • rss
  • facebook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