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Ⅰ서2:15-1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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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이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성경 / 요한일서 2 : 15 ~ 17
우리는 2024년 10월 13일 대한민국 창원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축된 의미가 많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선사시대(또는 원시시대), 고대시대, 중세시대, 근세시대, 근대시대, 현대시대, 미래시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인류 역사에서 우리는 현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라는 넓은 공간에서 창원이라는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그 영향권 아래 있습니다. 그 영향은 매우 강해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한글을 사용합니다. 세계에 수많은 언어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문화의 영향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 외에도 우리가 가진 생활 습관과 삶의 양식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문화와 문명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문화가 있고, 뒤처진 문화가 있습니다.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뛰어난 문화에 흡수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야만족이 로마를 정복했을 때 군사적으로는 로마를 지배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로마 문화에 흡수되었습니다. 백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크게 다릅니다. 서양의 문화를 접하면서 서양의 문물에 흡수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문화, 문명의 힘이 이렇게 강합니다. 요즘 K 문화가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 문화가 발달하고 앞서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 세대와 전 세계가 벗어나지 못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죄악의 문화입니다. 죄악의 양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근본적인 것은 같습니다. 이기심, 탐욕, 교만, 폭력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죄악의 뿌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죄악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불행이 있습니다.
문화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듯이 죄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죄악의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고, 오랫동안 흘러온 것이어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철하게 분석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죄에 오염되어 있는지, 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롬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합니다. ‘이 세대’는 죄악에 물든 세대를 말합니다. 죄악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죄를 삶의 수단으로 삼는 세대입니다. 이 죄악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서슴없이 죄를 범하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합니다. 두 가지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 세상의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문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저술한 ‘고백록(Confession)’에서 본문 16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은 이 3가지가 영혼을 병들게 되는 원인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는 본능입니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입니다. 식욕(食慾) 먹어야 삽니다. 성욕(性慾)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수면욕(睡眠欲)은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본능적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쾌락의 목적이 될 때 정욕이 됩니다.
예전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은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살았습니다. 이들은 매일 같이 잔치를 벌입니다. 갖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하루종일 먹습니다. 심지어 먹은 음식을 토해내고 먹는 일을 반복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적으로 매우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주후 79년 로마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중 하나였던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인해 일순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도시는 잿더미 속에서 완벽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우연히 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대규모 발굴작업으로 발견된 유물에서 당시 로마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주택, 공공장소, 거리에 벽화, 조각이 있었는데 아주 에로틱한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강력한 로마가 무너진 큰 이유 중에 하나가 향락에 빠져 도덕적으로 해이해져서 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물질에 대한 욕망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누군가 갖고 있으면 그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가진 자들의 사치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최고급 외제 승용차의 경우 수억 원에서 수백 억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이런 승용차를 다섯 대 여섯 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백 만원에서 수천 만원에 이르는 의상, 가방이 드레스룸과 창고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것으로 차별성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허영심에 차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할까요? 어느 정도가 지나면 무감각해집니다. 이러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높임 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해서 감투 쓰길 좋아합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초연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충실합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 합니다.
어거스틴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하며 자신이 이 병에 걸린 환자라고 고백하고, 영혼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다른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자각할 때 영혼의 질병에서 치유 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난간다”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지나갑니다.
이사할 때 그동안 사용하던 물품을 많이 버립니다. 또는 나이가 들어 요양원에 들어갈 때면 그동안 사용했던 물품을 정리합니다. 물품을 정리할 때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이를 구입할 때는 좋았는데 지나고 나니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전에 받았던 상장, 트로피, 감사패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이와 같습니다. 욕망에 눈이 어두울 때는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일입니다. 17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합니다. 육신을 위해 산 사람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벧전2: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류민과 나그네는 자기 집에 아닌 곳에서 일시적으로 머물거나 거류하는 자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을 ‘바벨론’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하며 거류민으로 살았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류민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벨론은 영원한 거처가 아닙니다. 70년이란 세월이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70년이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벨론 백성처럼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의 문화에 적응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까요? 바벨론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본을 보여준 사람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특별 교육을 받고 궁정에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자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그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바벨론의 총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바벨론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총리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문화에 휩싸여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벨론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산 다니엘의 모범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악의 문화가 뿌리 깊이 내린 이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우리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습니다. 잠4:23절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속의 영향을 받아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롬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질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행2: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했습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거듭나게 됩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세상 즐거움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한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과 말씀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딤후3: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였고,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깨우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십니다.
이것을 머리로 아는 것보다 삶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변화가 어렵습니다.
성령이 말씀을 통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과 성령을 통해 마음이 새로워지고, 삶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를 등한히 하여 신앙의 연륜은 늘어나고 있으나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난 10일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류 소설가 ‘한 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가수 김창완이 한 강씨와 인터뷰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에 요즘 최고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으를 때 “아주 밝고, 눈부시고, 아무리 더럽히려해도 더럽혀지지 않는 그런 인간의 어떤 지점, 투명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제게 크게 와 닿았는데 ‘한 강’ 작가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지만 그의 관심이 아무리 더럽히려 해도 더럽혀지지 않는 투명함이라는 말에서 영혼의 순수함을 추구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은 맑은 영혼입니다. 순수한 영혼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과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하나 하나씩 적용해 갈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순수한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은 나의 소견, 나의 생각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채워 우리 영혼을 맑게 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2024년 대한민국 창원에서 살고 있지만 타락한 세속의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말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지킬 때 세상이 넘어뜨리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영원한 본향을 향해 거룩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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