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베드로전서2:22-2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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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 / 베드로전서 2 : 22 ~ 25
제목 /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오라
‘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징’이라는 책을 저술한 ‘마크 데버(Mark Dever)’는 건강한 교회의 특성을 소개하는 중에 네 번째로 ‘회심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제시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회심 없는 성도, 회심을 등한히 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회심을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아 회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회심하지 않는 교인들이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고 교회를 운영합니다. 제직, 성가대원, 교사, 구역장, 기관장을 세울 때 회심의 여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모임으로 변질되어 끊임없이 문제와 분란이 발생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게 죄를 범합니다. 교회 내에서 온갖 문제를 야기합니다.
교회에서 회심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무얼까요?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는 회개하라는 말씀이 달갑게 들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기분이 상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이들이 좋아하는 말씀은 회심 없는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예수 믿으면 복받고,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예수 믿으면 치유 받고, 예수 믿으면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 보호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모이게 하려면 부담스럽게 여기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듣고 싶어하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심을 전하지 않는 겁니다.
회심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종교 기업처럼 변질되어 교회가 마케팅을 하고, 기업처럼 경영하며 이권이 우선되는 단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기독교 사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혼들의 회심’이라 하였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고, 말씀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심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회심이 무엇입니까?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하나님,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것이 회심입니다.
왜 회심해야 합니까? 왜 목자와 감독이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까? 하나님께 돌아오기 이전에는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은 양, 목자 없는 양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해 방황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같이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인간은 죄인으로 살면서 온갖 죄를 범하며 방황하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죄를 짓습니다. 아이를 키워보면 3,4세가 되는 때부터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내꺼야” “내가 할래” “나도”... ‘나’라는 의식이 생겨나면서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 위주로 생각합니다. 나 중심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갈수록 죄의 성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미움이 생겨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욕심을 부리고, 거짓말을 하고, 싸웁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면 영원한 사망에 이릅니다.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바르게만 살 수 있나? 살다 보면 죄를 지을 때도 있지” 하며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사는 것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죽음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 지나갑니다.
솔로몬은 최고의 영광을 누렸지만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 많던 재물도, 그 뛰어난 지혜도, 마음껏 즐겼던 향락도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나온 인생을 놓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어떤 판결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죄인은 의롭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도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준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절망적입니다.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안고 있기에 예수님에게 가야 합니다.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죄사함 받고 구원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였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죄와 더불어 살아왔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갔던 탕자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였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탕자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아버지의 집입니다. 집을 떠난 순간부터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곁을 떠난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방황을 끝내고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라고 합니다. 양은 눈앞에 보이는 풀을 뜯어 먹습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아 멀리 보지 못합니다. 양은 지혜롭지 못하여 뒤의 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눈앞에 보이면 먹고, 눈앞에 아무것도 없으면 굶습니다. 이런 양이 목자를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목자 없는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며 삽니다. 멀리 바라보지 못합니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삽니다. 이들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께 가야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헛된 욕망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이을 수 있습니다.
22~24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시려고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 입에 거짓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욕을 당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죄를 범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을 속인 적도 없는데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저항하지 않고, 맞서 싸우지 않으신 것일까요?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며,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웬만한 각오가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 어려운 길을 결정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로 인하여 지옥 형벌을 받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달린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셨습니까?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에게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심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십시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확신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파 이단의 경우 구원을 언제 받았는지 물어보고 이를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확신하고 있지만 이들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요? 거짓된 확신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마다 회심의 경험이 다릅니다. 디모데와 같이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언제 회심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극적인 회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태신앙이라도 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극적인 회심의 체험이 없다고 해서 회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 콘웰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인 ‘데이비스 웰스(David F. Wells)’는 회심을 ‘내부자의 회심’과 ‘외부자의 회심’으로 설명합니다. ‘내부자의 회심’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많은 지식과 믿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경험하는 회심입니다. ‘외부자의 회심’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자기 신념을 가진 자, 다른 종교나 이념을 가진 사람이 돌이켜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부자든 외부자든 자신이 처한 상황은 다르고, 회심의 과정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회심한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죄와 더불어 살던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마귀는 회심을 방해합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아도, 회심하지 않아도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마귀는 잘 속입니다. 속이는 데 귀재입니다. 말을 그럴듯하게 잘합니다. 이들의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달콤한 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진실함으로 회심하고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생에 이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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