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8-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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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희망을 만드는 자가 되라
성경 / 고린도후서 1 : 8 ~ 11
인생의 길은 평탄하지 않고 경사가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얼악한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위로 올라가면 풍요로운 좋은 환경이 펼쳐집니다. 경사진 길은 아래로 내려가기는 쉽지만 위로 오르기는 힘듭니다. 위로 오르는 것이 힘들다 하여 오르기를 포기하고 쉬운 내리막길을 선택하면 당시에는 쉽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비록 힘들더라도 오르막길을 오르면 이전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좋아져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비록 힘들어도 오르막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는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 직장,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려면 봉사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이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수고의 씨를 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선교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하며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말에서 바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뒤에 가면 11:23절 이하에서 바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합니다.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행하면서 많은 위험을 겪었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일을 겪었습니까? 젊을 때 나태하여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지 않아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는 최고의 율법 학자 가말리엘로부터 배운 엘리트였습니다. 율법과 학문에 능하였고, 유대 사회에서 인정받고 촉망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성격도 매우 적극적이어서 주도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고, 목표한 바를 열정적으로 추진하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배고픔과 굶주림과 헐벗음과 많은 고문을 당하고, 핍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한 알의 밀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 비전을 위해 헌신하였듯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과 하나님 나라 비전을 이루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하셨고, 자신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 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롬14:7,8절에서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살고 죽습니다.
이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주님처럼, 바울처럼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 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삶은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영광의 길이며, 영생의 길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사람이 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이 길이 영광의 길임을 깨우쳐 주실 때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사는 것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족들 간에 재산 문제로 우애가 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가족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에 형제간에 우애를 저버리고 남남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부모를 봉양하고, 어려운 형제를 간수하며, 가정을 일으키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그 삶이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가정은 부유하고 가난하고를 떠나서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욕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거듭날 때 이기적인 본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의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부호였던 ‘록펠러’는 “돈밖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돈이 많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알콜 중독자에게 많은 돈이 있다면 어떻게 살까요? 좋은 술을 마시며 살 겁니다. 돈이 적다면 저렴한 술을 먹고 살겠지요.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이 많으면 고급 도박장에 가서 카지노와 같은 게임을 할 겁니다. 돈이 없으면 화투 하며 지내겠지요.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됨됨이로 살아갑니다.
한 천사가 욕심 많은 사람과 질투심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저에게 소원을 말하면 그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로 소원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갑절을 드리겠습니다. 누가 먼저 말씀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자기가 먼저 이야기했다가는 질투심 많은 사람보다 덜 얻게 되기에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또 질투심 많은 사람도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얻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서로 입을 다물고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참 뒤, 욕심 많은 친구가 참다 참다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질투심 많은 사람의 멱살을 잡고 “네가 먼저 이야기해 안 그러면 죽이겠어.”하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질투 많은 사람이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소원은 한쪽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이 다 멀어버렸습니다. 욕심과 질투심에 눈먼 사람들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소유적 인간’은 물건이나 다른 사람들을 소유하는 데에 집착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이러한 유형의 인간은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소유적인 태도가 인간의 자유와 존재를 제한하고, 불안과 고독을 유발한다.
‘존재적 인간’은 물질적인 것이나 다른 사람들을 소유하려고 하기보다.. 인간성을 인식하고, 타인들과의 연결성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한다. 이들은 자유와 창조성을 중시하며, 인간의 인격과 가치를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프롬은 ‘소유적 인간’과 ‘존재적 인간’을 구분하고 인간이 소유적 태도에서 벗어나 존재적 태도를 갖추도록 권고하며,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의 인생이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브라질에 세계 3대 미항 중에 하나인 ‘리우 데자네이루’가 있습니다. 그 항구도시에는 거대한 예수상이 있습니다. 높이 30m, 두 팔을 벌린 좌우 길이 28m에 이르는 거대한 동상이 높은 바위 산 위에 있습니다. 해변에서 석양이 질 때 예수상을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동상 뒷산에는 세계 최악의 빈민가가 있습니다. 범죄가 많아 경찰도 치안을 포기할 정도이고, 갱단이나 마약범을 검거하기 위해 들어가려면 군대가 탱크를 몰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왜 이런 범죄 마을이 되었을까요? 예수의 상이 가까이 있다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범죄를 수단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가 누구일까요? 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겠습니다만 진작 가장 큰 피해자는 자신들입니다. 그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됩니다.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불행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고, 인간적인 냄새만 풍기는 역겨운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사랑으로 헌신하며 주의 길을 따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사랑으로 헌신함으로 아름다운 에덴 동산과 같이 기쁨이 충만한 희망촌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비전을 품고 교회를 섬기다보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같이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희망을 품고, 희망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비전을 품고 헌신하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목사가 어느 개척교회의 젊은 목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신도들이 다 떠나버리고 목사 내외 단 두 명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실망과 우울한 마음으로 침통해 있는 그들에게 언더우드 목사님이 웃으면서 “목사님은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 희망이 있다구요?” “지금 2명 밖에 없으니 여기서 더 줄어 들리는 없고 앞으로는 오직 늘어날 일만 남았으니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희망을 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에 젊은 목회자에게 희망을 심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은 언더우드와 같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어도 절망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언더우드, 아펜셀러와 같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왔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분들은 학식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한국을 택하였습니다. 한국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다수가 아닙니다. 창조적 소수가 희망의 역사를 만듭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하더라도 희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 비전을 이루고자 헌신하면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희망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 비전을 마음에 품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함께 하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은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하셔서 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은 우리의 희망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새 역사를 창조하며 희망을 만드시는 비전가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육지를 창조하시면서 우주의 질서를 세워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혼돈과 무질서한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심음할 때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여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시고 이들을 의의 백성으로 세우셔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우리의 희망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라 헌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12장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가룟 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꾸짖었지만 실은 물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아름답게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향유는 마리아의 전부였습니다. 마리아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마리아가 깨뜨린 향유의 향기는 온 집안에 가득하였고, 그 향기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 희망촌교회에 마리아와 같이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분들이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형편이 넉넉해서 드리는 게 아닙니다. 살기도 빠듯하지만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드립니다.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며 헌신합니다. 이분들의 아름다운 헌신은 우리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분들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 희망촌교회를 아름다운 향기나는 교회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 교회를 위한 헌신 향유옥합과 같은 헌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품고 주님과 함께 희망의 역사를 만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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