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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라 (예레미야애가3:19~39)
백종선 2024-07-14 추천 0 댓글 0 조회 321
[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3:19-39 개역개정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라

성경 / 예레미야 애가 3 : 19 ~ 39

 

그리스 신화에 판도라의 상자가 나옵니다. 제우스 신이 판도라라는 여인에게 그의 결혼을 축하하며 상자를 주었습니다. 대신 그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는 제우스 신이 준 상자를 열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온갖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담겨 있었고, 그 상자를 여는 순간 순식간에 빠져나와 세계에 퍼졌습니다.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졌고, 깜짝 놀란 판도라는 상자를 닫았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자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추하고 험악한 것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절한 희망이 있다면 지금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대궐 같은 집에 살아도 삶이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소망을 보여주시고, 우리로 소망을 품게 하시고, 그 소망을 이루십니다.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가 쓴 시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 후 유다 백성이 바벨론을 비롯한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무렵 기록하였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주전 5867월에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해 8월에 불에 타 소실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 슬프다로 시작합니다. 1장에서 슬프다로 시작하고 2장에서도 슬프다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말기에 선지자로 활동하며 유다의 몰락을 예언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의 몰락을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레미야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유다 백성들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평안할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핍박했습니다.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는 수난도 당하고 구덩이에 버려지는 일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럴수록 그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간절함으로 유다의 몰락을 경고했음에도 예레미야의 말을 무시했던 유다가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유다가 몰락을 당할 때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2:20,21절을 보면 여인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먹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고, 늙은이와 젊은이가 길바닥에 엎드러지고, 처녀들와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예레미야가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을 겁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유다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9:10~13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유다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인자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21,22절에서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비록 유다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가증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날을 예비하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세드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을 보면 하나님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게 두렵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자신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죄인까지 사랑하시고,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할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새날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25,26절에서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선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헤세드의 사랑을 하길 원하십니다.

6: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을 알고, 우리도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13:34절에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값지고 아름답게 합니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안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 준비에 내몰리고, 돈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돈의 노예처럼 사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을 아릅답고 값지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받을 때보다 사랑을 베풀 때 성숙한 사랑을 하며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을 판단하면서 사랑을 깨뜨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유다가 징계를 받은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 어떤 자세로 받아야 하는지 2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27~30절입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젊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고생은 장래 발전을 위해 좋은 경험이 되므로 달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은 경제인이 있습니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늘은 내게 가난과 무학,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몸을 주었다. 나는 이를 하늘이 내게 준 축복이라 생각한다. 매일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기에 열심히 일했고, 항상 건강에 신경 쓰며 관리를 잘해 90세가 넘게 살 수 있었으며, 어려운 형편에 소학교를 중퇴했지만 더 많이 알고 싶어 공부를 했고 모든 사람을 스승이라 여기고 열심히 배워 오늘의 성공을 이루었다.” 젊은 시절의 고생이 어떤 유익을 주는지 깨우쳐줍니다.

 

맹자는 생어우환 사어안락(生於憂患 死於安樂)’이라 했습니다. 우환이 나를 살게 하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말입니다. 힘든 일을 피하면 온실에서 자란 화초처럼 연약하여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젊을 때 고생을 하면서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 유능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매는 것이 좋은 것처럼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우신 멍에를 달게 지는 것입니다.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대라고 합니다. 겸손히 자세를 낮추어 징계를 달게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리라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지내며 겪게 될 수치를 감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유다가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10,11절에서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리는 징계는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리는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징계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더 힘들게 느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해 절망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는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연단한다 생각하고 인내하며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정금같이 빛나게 만들 겁니다.

 

유다가 징계를 받으며 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왜 징계를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 겁니다.

34~36절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두 주께서 기쁘게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유대 백성들은 갇힌 자들을 발로 밟고, 재판을 굽게 하고,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였습니다. 부패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법부가 정의를 잃어버리고 굽은 판결을 한다면 그 사회는 공의가 무너진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공의가 무너진 사회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그 사회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신뢰가 무너지고, 불법이 성행하여 결국 사회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유다가 몰락한 중요한 이유를 밝히시며 이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38,39절입니다.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화와 복을 주관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부패한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자신들 마음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들 위에 이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를 의식하지 못하면 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죄를 짓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화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힘써야 할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의의 사람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변화가 없이는 새로운 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의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벧전2: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새로운 희망을 열 수 있습니다.

헤세드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 긍휼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를 달게 받으면 연단되어 정금같이 빛나게 됩니다. 죄에서 돌이켜 의롭게 되면 징계가 끝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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