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시편119:65-7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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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 [성경본문] 시편119:65-7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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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 / 시편 119 : 65 ~ 72
제목 / 고난을 통해 깨닫는 율례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을 경험한 후 고난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기 전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을 경험하기 전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자녀들이 어떻게 인생을 알 수 있겠습니까? 홀로서기 하기 전까지는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쳐 보기 전까지는 인생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의 유익입니다. 고난의 유익을 알지 못하면 고난을 피하려 하고 영광만을 취하려 합니다. 하지만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의 유익은 쉽게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본문 67절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합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과 고난을 당한 후의 자신의 모습을 비교합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지만, 고난을 당한 이후에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합니다.
고난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릇된 생각을 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경험해야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인생을 쉽게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반드시 고된 홍역을 겪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이런 과정을 경험합니다. 이때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삶의 무거운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 어떤 사람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며 손을 놓아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헤어나오고자 범죄의 미혹에 빠져 나쁜 일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산다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인가보다 생각하고 체념하듯 이를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짊어지는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삶의 무거운 무게가 느껴질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허무한 길로 갈 수 있고, 불의한 길을 갈 수도 있고, 복된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고, 힘들게 생각될 때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생이란 원래 힘듭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고통의 바다, 괴로움이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만있으면 먹을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굶어야 합니다. 배고픔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몸이 단련이 되어 일에 적응이 된 사람은 힘든 일을 척척 해내지만 단련이 안 된 사람은 일이 힘듭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집니다. 사람 관계도 쉽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게 어렵습니다. 서로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냉정합니다. 약점을 이용합니다. 어떤 분야든지 인정받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육아가 힘듭니다. 집을 장만하고 안정된 생활 기반을 마련하는 게 어렵습니다. 힘든 일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힘든 일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을 쉽게 생각하면 힘든 일을 헤쳐나가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생을 각오해야 힘든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고생을 각오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힘든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죄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69절을 보면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70절에서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다”고 합니다. 이들의 마음이 비둔하여 ‘감각 없는 자’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고, 피해를 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큰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멍들고 응어리진 마음으로 눈물지으며 지옥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 인생 편하자고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71절을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배울 수 없었던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왜 인생의 짐이 무거운가? 산다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여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 실존에 대하여 눈이 열리고, 사회와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고, 인생을 논하는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의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고민을 통하여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될 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례 역시 고난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실체를 모르면 율례를 깨닫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례가 왜 필요한지, 이것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이전에는 율법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요시아 왕 때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하게 하려고 우상 제단을 허물고 우상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우상의 잔재를 제거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던 중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이 율법책을 소중하게 보관하지도 않고 방치해 두었다는 말입니다. 요시아가 율법책을 발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요시아의 아들들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이들이 율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율법을 배우고 자녀에게 가르치며 율법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때가 바벨론 포로시기입니다. 고난을 겪고 나서야 자신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율법에서 발견하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율법을 배우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신앙도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고난을 외면하고 영광만을 구합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의 변화산 변모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던 중에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두 사람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말한 내용은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 대화하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올라왔던 제자들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이 잠자다가 깨어나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구원역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분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겪으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염두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변모 사건이 있기 전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며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하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찾아와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이 이를 듣고 흥분하였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한 다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영광만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고난은 회피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시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분들 중에 제자들처럼 고난을 회피하고 영광만을 차지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이 감당하고 자신들은 영광을 차지하려 합니다. 이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난은 남아있지 않고 영광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런 말이 성경에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감당하신 고난이 부족하였다는 말입니까? 하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겁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감당하신 고난과 희생은 충분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더 추가해야 할 고난과 희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까요? 예수님은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셨지만 아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을 이루려면 이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골1: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였습니다. 영광스런 날을 맞이하려면 이를 위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영광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고와 땀, 눈물 없이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영광스런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고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인도 크로와 섬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매년 10만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잡혀 왔습니다. 이들은 중노동에 시달리며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들의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들의 영혼을 구원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드 도버’와 ‘데이비드 닛치먼’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섬에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외부인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 섬에 들어가기 위해 간구한 방법은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농장 주인에게 팔고 그 돈으로 섬으로 들어가는 경비를 대고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민족과 모든 백성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간 이들이 있었기에... 크로와 섬에 있는 노예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선교를 위해 중국인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살면서 풍토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경험하고, 함께 온 아내와 자녀들을 잃으면서까지 고난을 감수한 허드슨 테일러가 있었기에 중국에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엄청난 핍박과 억압을 받으면서도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간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릅니다. 고난을 회피하고 영광만을 거두려는 것은 아직 십자가의 희생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고 위대한 일인지 알지 못해서입니다.
바울은 롬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위한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무임 승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함께 고난을 감당하고 함께 영광을 거두어야 합니다. 고난을 감당하는 자 따로 있고, 영광을 거두는 자 따로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 희망촌 교회가 더 아름답고 좋은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고 영광만 거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는 더 좋은 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역사를 꽃피울 수 없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때 영광의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날은 고난을 통과해서 주어집니다. 고난이 영광의 날을 여는 열쇠입니다.
바라기는 고난의 유익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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