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4:34-38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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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 / 요한복음 4 : 34 ~ 38
제목 / 개혁의 샛별, 위클리프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지나간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하는 매우 중요한 정신을 담고 있기에 종교개혁의 역사와 인물을 살피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베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서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지만 이것이 갑자기 어떤 한 시점에서 시작된 일은 아니며 그 이전부터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왔기 때문에 놀라운 개혁의 역사가 가능했습니다.
먼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유럽 기독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13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국교로 삼은 이후 기독교는 유럽의 지배정신이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구 유럽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국가도 장악하여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을 넘어 국가지배세력에 대한 개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어떤 개인이나 몇몇 사람이 시도하여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변 상황이 무르익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종교개혁 직전의 유럽은 로마가톨릭이 지배해 오던 분위기에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4,15세기에 이탈리아 지역으로부터 시작된 문학과 예술의 부흥기인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라는 학문적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추구했던 것이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문명을 연구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서구사회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물결을 타고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를 뿌리 채 흔들었고, 근대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시대적 흐름이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이 서구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사상과 철학이 중세신학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철학은 중세신학의 시녀 역할을 하며 중세 신학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중세신학과 다른 이견(異見)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도 중세신학과 다른 주장을 하면 매장을 당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코페르니쿠스는 화형을 당하였고, 갈릴레이는 주장을 철회해야만 했습니다.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미술, 음악, 문학은 가톨릭교회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인정을 받았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은 사실상 금지되었습니다. 중세 서구사회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장악하고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이렇게 견고했던 중세 로마카톨릭이 흔들리게 된 것은... 그 당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서구사회가 도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났던 100년 전쟁, 유럽의 인구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공포의 흑사병, 서방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면서 거대한 혼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로마가톨릭교회는 세속적 권력과 부를 추구하느라 눈이 멀었고, 극도의 부패와 향락에 빠져있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로마의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동해 있었습니다. 100년 전쟁 중이었던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에 있었는데 영국교황청이 세금을 거두어 프랑스 왕가를 지원하자 영국 전역에 민족주의적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대혼란의 시기에 개혁의 횃불을 든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위클리프 John Wycliffe’입니다. 위클리프가 여러분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해가 1517년인데 위클리프는 1330~1384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50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자로 보는 것은 그가 비록 종교개혁을 성공하지 못했으나 종교개혁의 기치를 처음 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클리프를 ‘개혁 전의 개혁가’ 또는 설교제목에 나온 것처럼 ‘개혁의 샛별’이라고 부릅니다.
위클리프는 1330년에 영국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마을의 사제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는 사제가 교회 업무뿐 아니라 정부의 행정까지도 맡아서 일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마을마다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감독하고, 학교교육까지 관여하셨습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사제로부터 감독을 받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행정 관료로 보시면 됩니다.
위클리프는 1346년 16살이 되던 해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을 하였고, 그가 19살이 되던 해 1349년에 영국에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이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였고, 위클리프는 주변의 지인들과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깊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클리프는 공포와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는 갈수록 더 깊은 학문적 연구를 쌓아가며 성경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360년에 ‘발리올 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직을 맡았습니다. 그의 나이 39세에 신학사 학위를 받고, 2년 뒤에는 유럽 최고의 대학인 옥스퍼드에서 제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인 1372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무렵 영국은 오랫동안 교황청과 반목관계에 있었습니다. 영국의 존왕이 1215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 교황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그는 왕직을 계속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막대한 금액의 돈을 교황에게 헌납하도록 요구를 받는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존 왕이 죽은 후에도 교황청은 계속해서 왕들로부터 영국을 다스리는 일종의 통치세에 해당하는 상납금을 요구했습니다. 영국 왕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교황의 세금 징수에 반대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가 자신들이 내는 세금 중에 일부가 적국(프랑스)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00년 이상 치욕을 당해왔던 영국 왕실은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과 왕실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1374년에 위클리프는 그 한 가운데 서게 됩니다. 유럽에 있는 나라들은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정치적, 사회적 통치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교황권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였지만 왕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일에 집중하고, 정치적인 일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참된 의무는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성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교황이 큰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교회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누림으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위클리프의 이러한 선택과 행동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발견한 진리의 입장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였고, 그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중세교회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위클리프는 자신이 중세교회의 부패성을 지적하고 드러내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중세교회의 허위성을 밝혀내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조심스럽게 중세교회의 오류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376년부터 위클리프는 중세교회의 부정축재 행위에 대하여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출판한 저서들이 ‘하나님의 통치론, 시민 통치론, 왕의 책무론, 교회론 들이었습니다. 이들 저서에서 그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문제들은 성직자가 아닌 왕의 지배권하에 두어야 한다고 수장하였고, 교회와 성직자들은 더 위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영적인 스승과 안내자로서 사명을 진실하게 감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글은 교황청의 정곡을 찔렀고, 로마 교황청의 권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교황청은 즉각 위클리프의 발언에 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위클리프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위클리프는 소환을 받게 되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직접 압박을 받게 됩니다. 로마 교황청은 위클리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5통의 조서를 영국 왕실과 옥스퍼드 대학과 영국의 대주교에게 전달합니다. 위클리프가 쓴 ‘시민통치론’에서 18개의 오류를 지적하며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들을 향해서는 “영예로운 대학에 잡초가 자라나도록 방치를 하였다”고 하며, 위클리프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면 대학의 명예는 실추될 것이며, 교회로부터 어떠한 후원과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옥스퍼드 대학은 교황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위클리프의 주장들은 비록 듣기에는 불쾌하지만 아주 틀린 것은 없는 내용이다”고 하며 위클리프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대학 전체가 위클리프를 지지하고, 그에게 계속해서 가르칠 수 있도록 했지만 위클리프는 자신으로 인해 대학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물러섰습니다.
위클리프는 비록 대학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청빈한 사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사제들이었고, 일부는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성경을 설교하였고, 청중들로 진리를 분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영국 전역을 다니면서 가톨릭교회의 악습을 고발하고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위클리프가 쓴 소책자들은 이들을 통하여 영국 전역에 유포되었고, 이들은 위클리프가 작성한 수백 편의 설교를 가지고 설교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교황청에 대분열이 일어납니다. 아비뇽 유수라고 불리는 교황청을 프랑스에 두었던 때가 있었는데 1377년에 다시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하면서 프랑스 교황과 로마 교황으로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됩니다. 그리고 두 교황은 자신의 무오함을 주장하며 상대를 향하여 파문시키는 웃지못할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대분열 사건’입니다. 그 후 39년 동안 두 개의 교황청이 양립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이 발생한 원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위클리프입니다.
교황청에 이런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동안 위클리프는 시간을 내어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밝혀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견’을 세상에 공포합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어떤 사람도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모든 교리와 모든 가르침의 유일무이한 기초가 된다”
1378년 5월에 ‘성경의 진리에 관하여 On the Truth of Holy Scripture’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여 교황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원칙에 관한 진리라는 사실의 기초로 가톨릭교회에 만연하고 있던 거짓을 조목조목 파헤치며 반박했습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알고 성경을 지켜나갈 권리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위클리프가 성경에 근거하여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지적한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고해성사(告解聖事)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사제에게 나와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죄의 고백이 끝난 후에는 완전한 죄 용서를 받기 위해 사제가 지시하는 보속 행위를 행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위클리프는 “죄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참 사제이다. 고행성사는 성경 어디에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적도 없다. 오순절 성령 강림일에 그리스도께 회개하고 돌아왔던 삼천 명 중에 한 사람도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2. 사면권(赦免權)입니다.
위클리프는 돈을 지불함으로써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거나, 사제가 머리에 손을 얹고 “내가 너를 사하노라”고 말했기 때문에 죄 사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이단적인 교리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함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부터의 용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3. 면죄부(免罪符)입니다.
교황청은 교회 건축으로 인해 빚어진 엄청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 기금 조성의 수단으로 면죄부를 만들었습니다. 가톨릭은 이 면죄부를 사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연옥에서 곧바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원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는 생각들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면죄부만 사면 모든 죄악이 깨끗이 말소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위클리프는 “나는 면죄부를 발부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지혜를 명백히 모독하는 행위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마치 소나 나귀를 사고 팔 수 있는 것처럼 은혜를 사고 팔 수 있다고 하며 면죄부 판매를 합법화하여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게 만들었으며, 면죄부 판매는 교황이 마치 무제한으로 영혼을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서 이는 명명백백한 신성모독임을 공포한다”고 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성찬에 대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화체설’을 믿고 있었는데... 사제가 미사를 집전할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이 화체설을 반박하였습니다. “화체설은 성경에 없는 이론이며,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학설이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에 불과하다. 사제들이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실제적인 몸이 아니라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학자들이나 성직자들만이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사람들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알지 못하는 한 결코 믿음의 진리들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위클리프는 어두웠던 시대를 말씀의 빛으로 밝히는 일에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위클리프의 개혁은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클리프는 개혁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말았으나 위클리프가 이루어놓은 업적이 있었기에 그 후에 존 후스와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어 개혁을 성공하게 했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 분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심겨졌고, 그 열매로 우리는 구원의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열매가 맺어질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위클리프도 예수님처럼 심는 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당대에 그 빛을 보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기에 그 심은 노력과 희생이 헛되지 않고 후 세대에서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심는 노력을 기울일 때 그 말씀이 언젠가 풍성한 열매가 되어 거두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를 소망하며 진리의 말씀을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한국교회를 새롭게 개혁하는 밑거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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