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욥기6:14-3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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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제공: 대한성서공회
본문 / 욥기 6 : 14 ~ 30
지난 시간에 이어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이 이어진다.
앞에서 욥은 자신이 겪은 고난의 무게가 바다의 모래보다 무겁다고 하며 그 고통의 무게 때문에 나의 말이 경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통이 크면 탄식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며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친구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다.
14절에서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한다.
낙심한 자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친구라면 그를 동정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재난을 보고도 동정하기보다는 네가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재난을 당하였다는 식으로 충고하였다. 이것이 욥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자신의 실수로 또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 낙심할 때가 있다. 이런 친구가 있으면 충고하며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를 위로하고 힘든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한다. 동업자라면 책임 소재를 묻고 따질 수 있다. 관계가 가깝지 않다면 자업자득이다는 식으로 속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 정말 친구를 위한다면 친구가 이 힘든 순간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결과만을 놓고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이런 식의 조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더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15~17절에서 욥은 친구들의 변덕스러움을 비유를 들어 말한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내 형제들이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다 한다. 근동지역에는 ‘와디’라 불리는 천이 있다. 비가 내리는 우기에는 천을 이루어 흐르다가 건기가 되면 천이 말라 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천을 가리켜 ‘와디’라 한다. 욥은 ‘와디’와 같이 친구들이 변덕스럽다고 말한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욥이 재난을 당하기 이전과 재난을 당한 후가 달라졌다. 친구가 부유할 때는 잘 대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면 차갑게 대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없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배우자가 능력이 있고, 잘 나가면 잘 대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하면 무시하고 차갑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진정한 부부의 관계라고 할 수 없다. 한결같아야 한다.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친구의 여건에 따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다면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없다. 욥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친구들을 보며 크게 실망했을 거다.
18~20절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18절에 ‘대상’이 나온다. 이들은 상인들 무역상을 말한다. 이들이 사막길을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하여 갈 때 물을 준비해서 가지만 중간에 물이 떨어지면 물이 있는 오아시스를 찾는다. 이들이 오아시스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곳에 물이 없으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욥은 재난을 만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친구들이 오아시스와 같이 힘든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들은 기대를 저버렸다. 그래서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일관된 신실함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친구를 사귀다 보면 실망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태도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약점이 보여도 변함없는 우정을 지킬 때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다.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뛰어난 재능일까? 뛰어난 재능이 큰 역할을 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성실함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성실한 사람은 한 우물을 파면서 결국 성공의 자리에 이른다. 토끼와 거북이 경기가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성공 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 신실한 사람이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 친구에게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보다 변함없는 신실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22,23절에서 욥은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며 묻는다.
욥이 친구들에게 바라는 것은 재물이 아니다. 자신을 폭군의 손에서 건져달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든 마음을 헤아려주며 함께하는 것이다.
친구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와 함께하는 것이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자신이 무언가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물질적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함께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힘든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것과 누군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누군가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면 큰 힘이 된다.
24절에서 욥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한다.
욥은 구체적으로 나의 허물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 한다. 그러면 두말하지 않고 잠잠히 있겠다고 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무언가 잘못을 하였기에 이런 재난을 겪는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욥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한 증거 없이 인과응보의 논리만을 가지고 충고했다.
25절에서는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이 무엇을 책망함이냐” 한다. 엘리바스는 지금까지 그가 아는 지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욥에게는 고통을 주었고, 책망의 소리로 들렸다.
26절에서 욥은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한다. 엘리바스의 말은 욥에게 실망을 주었다. 그 말이 욥에게 교훈이 될까? 바람에 불과하다. 바람은 지나가면 실체가 없다. 이처럼 엘리바스의 말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실망을 주는 사람의 말은 귀에 남지 않는다. 신뢰를 주는 사람의 말이 영향력이 있다.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신뢰를 주고, 이런 사람의 말이 사람을 움직인다. 저와 여러분이 이와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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