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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해 7 (딤후2:10-13)
백종선 2014-05-15 추천 0 댓글 0 조회 146
 

성경 / 디모데후서 2 : 10 ~ 13

제목 /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앞에서 바울은 충성된 일꾼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 가지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 법과 규칙을 지키는 운동선수, 수고하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라고 한 이유는... 자신은 지금 로마 옥중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계시므로 복음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옥에 갇혀 죽을지라도 의기소침하지 말고 메이지 아니하시는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충성된 일꾼으로 복음의 사역에 매진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옥중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왜 자신이 이 길을 선택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거짓말이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고 말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면 풀려날 수 있습니다. 풀려나면 로마를 빠져 나와 로마권력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바울이 이 길을 선택한 이유를 10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누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고 있다고 하였습니까?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고난과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고 하면 자신은 살지 모르나 이것이 알려지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거짓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서 떠날 것이고, 더 이상 누구도 이 복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이 결정한 이 선택은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희생까지 각오하며 감당하는 것, 이것은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과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역시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내 살 길만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두 사람의 비교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세월호를 운항했던 선장입니다. 그는 배가 침몰하고 있을 때 그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승객들의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살 길을 찾았습니다.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지도 못하고 팬티바람으로 나오는 광경은 여러분도 방송을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생명들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이런 잘못된 생각이 엄청난 참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선장과 비교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안산단원고등학교 2학년 생으로 수학 여행길에 올랐던 안산명성교회 관리집사의 딸인 양온유 양입니다. 온유는 배가 침몰할 때 갑판 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유는 선실에서 울고 있는 자기 친구들을 두고 자기만 살 수 없다고 하여 다시 내려갔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온유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애는 그럴 줄 알았다.” 평소에도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아이였습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했던 그녀는 학교에서 반장을 하였고 1학년 때는 학년대표를 맡고 있다가 2학년에 올라와서 친구가 학년대표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보했습니다. 또한 다른 친구들이 학원에 갈 시간에 온유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부모님을 돕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온유양이야 말로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의 유형 중에 어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상황에 처하였을 때 나부터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밀치고 넘어뜨리고 빠져나오는 쪽입니까? 아니면 내가 희생을 하더라도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쪽입니까?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이 고난과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올지를 계산하기보다 우리 모두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생각하고, 내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의 살 길만을 찾았던 모습으로 살아왔더라도 이 시간 이후부터는 바울과 온유양이 보여준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길로, 나의 유익만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을 위해, 나의 기쁨과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 바랍니다.

 

11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로 시작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헬라어로피스토스(πιστοσ)’ 입니.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할 때 피스토스가 사용되었고, 2절의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을 때도 피스토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것’(faithful)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11절에서 미쁘다라고 할 때 무엇을 두고 미쁘다고 하였을까요? 13절을 보면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미쁘다는 주님을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미쁘시다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왜 주를 미쁘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주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이고, 또한 복음을 위해 고난을 참으면 주께서 우리를 왕 노릇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미쁘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에게 부활의 길로 인도하시는 미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죽으실 때만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 살지 않고, 병든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 슬픔에 잠긴 자, 갇힌 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고 이들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그들을 섬기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절음발이, 앉은뱅이, 맹인과 같은 병자와 장애인들을 자신들의 죄로 인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고, 저들을 부정하게 여겨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에 대해서는 나라를 배반하고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파렴치한 인간들로 치부하였고, 창녀들은 몸을 팔아 생존해가는 부끄러운 인생들로 생각하며 이들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병을 고치시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며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저들이 더 이상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외면당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저들의 삶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병든 자, 소외당한 자, 가난한 자, 죄인과 세리, 창기들을 삶의 자리를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섬기시는 힘들고 부담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며, 제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는 주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이를 위해 고난의 길을 인내하며 가는 자는 주와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렇게 사셨을 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자에게 부활과 왕의 신분을 허락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복음(ευαγγελιον)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라는 말은 기독교만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 단어를 사용하기 이전에 로마제국시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시대 때 이 용어는 로마황제에게만 적용되어 사용하였습니다. 황제의 탄생, 황제의 임직, 황제의 통치, 황제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에게 이렇게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황제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분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여 황제에게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지금 북한의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김정은이 신격화되어 있습니다. 김정은이 하는 모든 일을 영웅시하며 김정은이 등장할 때마다 열렬하게 환호합니다. 그들은 김정은이 자기들에게 기쁨을 준다고 생각하고 김정은에게 환호하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을 복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하였던 복음이라는 말은 마가는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에게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누가 진정한 복음인가? 하고 도전장을 내밉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가 기쁨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통치가 기쁨인가를 물으며 예수님이 다스리는 통치가 진정한 기쁨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로마 사회는 로마 시민보다 노예의 수가 7배나 많았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소수의 시민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예로서 주권을 박탈당한 채 자유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 시민들 중에서도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1차 산업인 농사가 경제기반이었던 농경사회에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가난과 빚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부려 대단위로 농사를 짓는 영주들과 경쟁이 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그들은 견디지 못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팔아 로마로 올라옵니다. 황제는 이들의 쌓인 분노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원형경기장에 불러 모아놓고 격투사들이 벌이는 싸움을 보며 그들의 쌓인 분노를 풀게 하고, 그들에게 빵을 던져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로마사회에서는 황제와 원로들, 영주, 기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우 던져주는 빵을 먹고 겨우 연명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황제의 통치가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황제가 공짜로 빵 한 조각씩을 던져 준다고 하여서 그가 복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진 자, 힘 있는 자, 강한 자만이 주인 행세하고 대우받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즉 병자, 가난한 자, 연약한 자, 무시당하는 자, 죄인들로 치부되었던 자들의 삶의 자리를 회복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펼치실 사역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알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나라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그 시대는 죄악이 관영하고 흑암의 세력들이 그들의 힘으로 세상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폭력을 휘두르며 자신들만의 세계로 만든 암울한 시대였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실현하며 사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실현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누룩과 같이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퍼져나가면 온 세계가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우리에게 도래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로마 황제만이 왕이고 주인인 로마 사회와는 달리 모든 백성들이 주인이고 왕이 되는 나라입니다. 누구도 소외받거나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억압받지 않고,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공존하여, 서로가 사랑으로 섬기며, 주 안에서 형제자매와 같이 한 가족이 되어 사는 나라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통치가 복음입니까? 로마 황제입니까? 예수님입니까?

힘에 의해 다스리는 황제의 나라인가요?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 모두가 왕 노릇하며 사는 하나님의 나라인가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타락한 세상에 편승하여 죄악의 세력과 손을 잡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된 세상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죄악된 세상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길이며, 모든 사람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샬롬을 실현하는 길이며, 우리 모두가 영생을 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셨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기 바랍니다.

힘으로 다스리는 황제의 세계에서 이들의 세력과 결탁하여 자기 살 길을 찾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선택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고 확장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거룩한 발걸음을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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