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말씀과기도 >
  • 주일낮예배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7:13~14)
백종선 2025-08-10 추천 0 댓글 0 조회 44
[성경본문] 마태복음7:13-14 개역개정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경 / 마태복음 7 : 13 ~ 14

 

본문은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5~7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신약의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산상수훈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였습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7:24~27절에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하며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이 지혜로운 자이고, 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후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할 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고, 복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느 길을 가야 할지 결단을 촉구합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자가 적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합니다. 이 길을 가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행할 것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편한 인생을 살 것인가를 놓고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의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옷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지혜를 드러내고,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덕을 세운다. 우리는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살아낸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의 길을 가려는 분들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배우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말씀대로 행할 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어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말씀의 유익함과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앙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신앙을 관념화하여 지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는 것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고,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단어의 뜻으로 보면 제자와 신자가 다릅니다. 하지만 제자와 신자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되는 것은 곧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지 않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지 않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신자라고 말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을 따라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 오늘 본문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문을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넓은 문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길이 놓여 있습니다. ‘넓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길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어떤 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생명과 멸망이 결정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생명에 이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멸망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이 제시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장 크게 확장되고 화려했던 때가 언제였을까요? 중세시대입니다. 중세시대는 기독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을 세우고 하야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한 가지가 부족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엄숙하게 예전을 집례하였습니다. 오르간 소리와 훈련된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하지만 중세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낭독하였으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큰 성전을 가득 채웠으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중세 교회가 좁은 길을 갔습니까? 넓은 길로 갔습니까? 영생에 이르렀을까요? 멸망에 이르렀을까요?

중세 교회는 자신들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들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중세 교회의 흔적은 뿌리 깊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르간 연주와 성가대의 웅장한 찬양 소리와 격식 있는 예배 순서가 진행됩니다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경건한 분위기의 예배에 참여하여 마음의 위안을 받고 힘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40일간 금식 기도하신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탄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라입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를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가뿐하게 뛰어내리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능력을 보고 환호하며 추종할 것입니다. 자기 명예와 자기 영광을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을 너에게 주겠다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에는 물질적 풍요, 세상 영광, 세상 권력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사탄이 유혹한 이 세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과 자기 영광과 명예를 차지할 수 있는 곳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모여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십자가의 길입니다.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신 길에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이 길로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중세 교회의 뿌리가 남아 있는 교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닌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몰립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도, 제자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되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이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경고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면 멸망에 이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좁은 문, 좁을 길로 가면 생명에 이른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넓은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좁은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넓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돈과 명예와 권력을 차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끝은 멸망입니다. 좁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길이 협소하여 험난하고 힘든 여정을 해야 하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하셨습니다. ‘누구든지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부패한 인간은 욕망을 추구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키고 싶어합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여기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만족할 수 없는 갈증입니다. 그래서 이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불의한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타락한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옛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죽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를 때 겪는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14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다하였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테슬림메네 τεθλιμμένη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압박하다, 고통을 주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르는 자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말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물질적 풍요, 세상 영광, 세상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삽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삽니다. 삶의 방향이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핍박한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도 핍박합니다. 이를 각오하지 않으면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찬송가 338장를 보면 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생길이지만 찬송하면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 권력, 명예,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삶이 힘들고 재미없고 낙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과 놀기 좋아하는 학생을 놓고 본다면 누가 행복할까요? 놀기 좋아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힘들어 보이고 재미없어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놀기 좋아하는 학생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기쁨이 있습니다. 미래의 꿈을 성취해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뿌듯함과 긍지가 있습니다. 어느 기쁨이 클까요?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누리는 평안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자기 삶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길을 가는 자랑스러움이 있습니다.

 

어둠에 거하는 것이 기쁠까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기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즐거움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진리 안에 거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는 길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며, 본능적으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합니다만 이 길의 끝이 어딘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 마지막 때가 되어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면 아쉬움과 허무함만 남습니다. 지나온 자신의 삶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죄와 더불어 살아온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멸망에 이릅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눈앞의 것만 보지 마시고, 멀리 보십시오. 일시적인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지 마시고,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값지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무엇이 인생의 정답인지 알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같이 추구하며, 이를 누리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여 이 길을 가지만 그 길이 정답이 아닙니다.

인생의 해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적지만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의 삶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결단하여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길로 가실 수 있길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생명의 빛 (요한복음1:1~5) 백종선 2025.08.17 0 48
다음글 섬김의 행복 (요한복음13:12~17) 백종선 2025.08.03 0 46

63082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앵지밭골1길 59-25 (회원2동 740-1) TEL : 055-247-7328 지도보기

Copyright © 희망촌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6
  • Total65,901
  • rss
  • facebook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