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말씀과기도 >
  • 주일낮예배설교
강권적인 그리스도의 사랑 (고린도후서5:13~!5)
백종선 2025-07-30 추천 0 댓글 0 조회 1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5:13-15 개역개정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강권적인 그리스도의 사랑

성경 / 고린도후서 5 : 13 ~ 15

 

여러분의 궁극적인 삶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삶의 동기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바람직한 인간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자...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동기가 많습니다.

삶의 동기는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가질 수도 있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동기는 부모나 스승 또는 주변 어른들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고, 책을 읽다가 크게 와닿아 생길 수도 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에서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삶의 동기가 형성되었든지 간에 삶의 동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삶의 동기를 가졌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졌던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돈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백통의 팬 레터를 받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마릴린 먼로는 그녀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을 가졌으나 공허하고 불행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얼까요? 궁극적인 삶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산업체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를 찾아온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로 데뷔하게 되었고, 인기가 올라가자 배우로 발탁되어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마릴린 먼로라는 예명을 사용하였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신경 안정제를 과다 복용하여 사망했습니다.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했던 검시관은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허함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발탁되어 상품처럼 만들어진 삶이었기에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바칠 만한 의미 있는 삶의 동기를 갖지 못하면 마릴린 먼로와 같이 공허함으로 인해 불행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만약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 자신의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가진 삶의 동기가 자신의 일생을 바칠 만큼 중요합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까? 그것이 과연 내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입니까?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하기 전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진정한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삶이 공허합니다. 삶이 무의미합니다. 영혼의 갈증을 느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할 중요한 삶의 동기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그 사랑이 내 삶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과고 합니다. ‘강권하다는 헬라어로 쉬네코’(συνχω)입니다. 이 단어는 σν()χω(에코)의 합성어로... σν()함께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이고, ἔχω(에코)붙들다는 뜻을 가진 동사인데 이 둘이 합쳐져서 쉬네코’(συνχω)가 되었습니다. ‘강력하게 붙들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인물입니다. 3:7,8절에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다 생각했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발견한 사람, 예수님의 진가를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께 매료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심장에 새겨지게 되고, 그 사랑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력한 삶의 동기가 됩니다.

 

13,14절을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합니다. 바울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26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 총독 베스도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였을 때 베스도는 바울에게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베스도 뿐만 아니라 바울이 어떻게 사는지 아는 사람 중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으로도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좋은 자질과 스펙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유능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며 이전에 유익하게 여겼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만 몰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달라진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 좋은 조건들을 버리고 온갖 고생을 감수하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 이 험난한 길을 가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이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일생을 하나님께 바쳐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로 가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큽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그 사랑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자신의 인생관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 사랑을 위해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랑보다는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합니다. 돈이 최곱니다. 이들은 인격적인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용의 가치가 없으면 부모 형제라도 차갑게 대하여 외면합니다.

마틴 루터는 자기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자기에게로 굽은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비인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더 팍팍해졌습니다.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가정이 해체되고 풍요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서로 간에 지켜져야 할 도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물질 우상과 자기를 모든 것에 중심에 두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기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 우상과 자기 우상에 빠진 인간에게서 사랑과 도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구성원인 사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병든 사회입니다.

우리가 돈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돈은 경제활동에 편의를 위해서 만든 도구입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입니다. 생명입니다. 돈 때문에 생명을 경시하고, 돈 때문에 인간을 이용하고, 돈 때문에 인간을 도구화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집니다. 인간이 비인간화됩니다. 큰 죄를 범하는 겁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는 것을 넘어, 우리를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시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병든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겪어야 하는 불행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불의로 인하여 파괴된 이 세상을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깨달으면.. 이전에 이기적으로 살았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강력한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힌 바 되어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 땅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병들고 타락한 인간과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힌 바 된 사람에 의해 새로워집니다. 건강한 사회로 회복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탄생합니다. 온정이 넘치는 따뜻한 세상이 됩니다. 사랑과 의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바울은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았기에 이전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15절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희생시키고서는 자신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비로소 찾아옵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삼키려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돈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거짓으로 백성을 속입니다. 불법을 저지릅니다.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이 과연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이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릅니다. 이들에게 동조하고 지지하며 이들의 비호를 받으며 자기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들의 만행을 저지하고, 이 세상이 악한 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 땅에 공의를 세우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전자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높아져서 권력을 장악하여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부()를 차지하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을 입어 구원받은 백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를 헤아리고 우리 또한 그 사랑으로 살아가며 죄인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이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강권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욕망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바라기는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섬김의 행복 (요한복음13:12~17) 백종선 2025.08.03 0 1
다음글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 (요한계시록5:1~14) 백종선 2025.07.21 0 21

63082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앵지밭골1길 59-25 (회원2동 740-1) TEL : 055-247-7328 지도보기

Copyright © 희망촌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4
  • Total64,782
  • rss
  • facebook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