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말씀과기도 >
  • 주일낮예배설교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 (요한계시록5:1~14)
백종선 2025-07-21 추천 0 댓글 0 조회 20
[성경본문] 요한계시록5:1-14 개역개정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

성경 / 요한계시록 5 : 1 ~ 14

 

에릭 프롬(Eric Fromm)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인간을 Homo Esperans라고 정의했습니다. Homo Esperans희망의 인간’ ‘희망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동물은 본능을 따라 살아갑니다. 생존의 본능, 번식의 본능에 의해 움직입니다.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고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직면한 순간의 어려움을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동물의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만 년 전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똑같습니다.

인간에게도 본능이 있지만 본능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합니다. 어떤 삶이 이상적인 삶인지, 어떤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인지 생각하며 이상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을 타고났어도 희망이 없는 사람은 좋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희망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품고 사는 Homo Esperans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5년 후의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세계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세계 경제가 침체하여 시장이 활력을 잃었고, 지석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I.T 산업,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하는 A.I 산업의 출현과 전자 화폐의 등장 등... 이런 변화로 인하여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에도 기독교인들이 큰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금을 당하고, 유배되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간이 지속되면서 기독교인들의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갖게 된 질문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그 내용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계시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여주신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펼치실 역사를 보여주심으로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4: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리셨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보여주셨습니다. 역사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시대를 살고 있어도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 해석이 달라집니다. 왕의 시각으로 보는 역사와 백성의 시각으로 보는 역사가 다릅니다. 지배국의 입장에서 보는 역사와 피지배국가의 입장에서 보는 역사가 다릅니다. 그래서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적 시각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예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세계를 이끌어가시는 역사의 주이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실족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앞이 막막해집니다. 악한 세력의 힘 앞에서 무력함을 느낄 때 절망감을 느낍니다. 이런 이유로 소망을 잃어버리면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회의적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알 때 소망을 갖게 되고, 힘을 내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역사를 펼치실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므로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펼치실 역사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펼치실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루마리에 기록하신 대로 역사가 전개될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고,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앞으로 전개될 역사가 분명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하나님이 세우신 뜻대로 펼쳐집니다.

 

둘째, 악인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2:9~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악인들을 심판하실 재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악으로 가득합니다. 흑암의 세력들이 저지른 악행들이 숨겨져 있어서 그렇지 그 실체를 다 드러낸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는 고통과 비극은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고통과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악인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먼저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기에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셔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악인을 심판하시느냐입니다. 누가 심판의 권한을 갖느냐에 따라서 그 심판이 공의로울 수 있고, 불의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국가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가 정치 권력과 사법부의 부패입니다. 이들은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공권력을 행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공정성입니다. 공정할 때 국가의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고, 공의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권을 위해 권력을 남용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공의가 확립되지 못하여 계속해서 부정과 비리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악인을 심판하실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에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고, 봉인된 인을 땔 때 재앙이 임하여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을 때는 것은 심판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가 인()을 때느냐에 따라 공의로운 심판이 될 수도 있고, 불의한 심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누가 그 인을 떼이게 합당하냐? 고 물은 것입니다.

 

3절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땔 수 있는 합당한 자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절을 보면 요한이 인()을 땔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크게 웁니다. 지금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로마의 압제하에서 핍박과 박해를 받아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두루마리를 펼칠 자가 없으면 악인을 심판할 수 없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낙담하여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두루마리를 뗄 자가 없어 낙심하여 크게 울고 있는 요한에게 장로 중 한 사람이 희망의 소식을 전합니다. 5절입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입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 하며 그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분을 소개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가 그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악의 세력을 이기신 것을 두고 한 말합니다.

 

6절에서 일곱 인을 땔 어린 양이 등장합니다. “그 어린양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말합니다.

 

7절을 보면 그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권세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취하였을 때 24장로와 4생물이 새노래를 부릅니다. 9,10절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24장로와 4생물이 예수님이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다고 하며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인봉를 떼기에 합당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악의 권세를 이기셨고, 자신의 피 값으로 백성들을 사셨고, 이들을 하나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구원과 연결되지 못하는 심판은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는 심판은 무의미합니다. 구원을 위한 심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시고 구원을 성취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고,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역사의 큰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펼치실 역사는 악에 대한 심판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리시어 하나님이 펼치실 역사를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이 펼치시는 역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의 큰 그림을 알 때 현재 겪고 있는 일들로 인해 일비일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일로 인해 염려하며 불안해하지 않고 큰 그림 속에서 현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가 겪는 불행과 불안은 이 세상의 죄악으로 인함입니다.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도 염려와 두려움과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악의 역사는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날들은 다 지나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악의 역사를 종결짓고, 새 시대 새 역사의 문을 여십니다.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펼치실 대역사 드라마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궁극적인 소망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성취하셔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에 기대를 거는 한 소망은 없습니다.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역사의 중심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둘 때 실족하지 않고, 영광스런 날을 바라보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며 개척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강권적인 그리스도의 사랑 (고린도후서5:13~!5) 백종선 2025.07.30 0 12
다음글 두려움이 없는 사랑 (요한일서4:16~21) 백종선 2025.07.13 0 25

63082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앵지밭골1길 59-25 (회원2동 740-1) TEL : 055-247-7328 지도보기

Copyright © 희망촌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2
  • Total64,780
  • rss
  • facebook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