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디모데후서2:9-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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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이렇게 고난을 대하라!
성경 / 디모데후서 2 : 9 ~ 13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은 고난이 신자들의 신앙을 단련하여 더욱 견고하게 하기에 고난이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으로 이겨내면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여 정금 같이 만들기도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난에 직면하였을 때 이를 견디지 못해 회의감에 빠져 신앙을 떠나기도 합니다.
신학자였고, 목회자였던 ‘바트 어만’(Bart D. Ehrman)이라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독교를 떠났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떠난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비참함과 고통을 겪는다.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이 문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의 문제는 신앙을 흔들어놓을 만큼 강력합니다. 많은 사람이 고난이라는 장애를 넘지 못하여 신앙을 떠납니다.
이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고난을 피하여 자신의 안위만을 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며,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인생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인생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가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인간이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입니다. 범죄하기 이전에 인간의 삶은 고통이 없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고, 평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두려움이 찾아왔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인간의 관계가 파괴되어 평강을 잃어버렸습니다. 생존을 위해 고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통의 원인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하시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도 고통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죄인을 구원하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신앙 생활하는 목적을 개인의 풍요와 안락에 둡니다. 이런 분은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어려움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고 그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신앙 생활하면 앞에서 소개했던 ‘바트 어만’과 같이 고난을 겪을 때 회의에 빠져 신앙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 진노하시는지 가르쳐 줍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동시에 성경은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실수를 했거나 잘못을 해서가 아닙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최악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형통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강건하게 살다가 죽었다며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반면 정직하고 청결하게 살아온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바울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죄를 범하고 악을 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충실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옥에 여러 번 갇혔고, 견디기 힘든 잔혹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항해를 하던 중에 여러 차례 배가 파선되어 위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죄인이 형통하다는 것은 세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는 의인일수록 고통을 당합니다. 악인이 권세를 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악인의 꾀를 따릅니다. 죄인의 길을 갑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죄인이 형통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사명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그 길을 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본문 9절에서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로마 옥중에 갇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풀려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면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도록 고난 중에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이 매이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은 매이지 않고 전파되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길을 선택한 이유를 10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누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합니까?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려고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며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만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어둠의 권세로 인해 억압당하며 신음하는 자들의 고통을 아시고, 이들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 새로운 희망을 열 수 있습니다.
요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떳떳하지 못했던 베드로의 마음을 풀어주시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며 베드로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우리는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이렇게 살면 자기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으나 사명을 감당하는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사명을 감당하는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죄인의 신분이 되어 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ευαγγελιον)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시작된 단어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 단어를 사용하기 전에 로마에서 사용하였습니다. 로마 시대 때 이 용어는 로마 황제에게만 적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황제의 탄생, 황제의 임직, 황제의 통치, 황제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에게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황제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여 황제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했던 복음을 예수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막1: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시는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나라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로마 사회는 로마 시민보다 노예의 수가 7배나 많았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소수의 시민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람이 노예로서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 시민 중에서도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 시민의 삶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노예를 부려 대단위로 농사를 짓는 영주들과 경쟁이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그들은 농지를 팔 수밖에 없었고, 땅을 잃어버린 시민들은 로마로 올라와 원형경기장에서 격투사들이 벌이는 싸움을 구경하며, 로마가 제공하는 빵으로 연명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로마 황제의 통치가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힘 있고 강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즉 병자,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그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시대는 흑암의 세력들이 그들의 힘으로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들만 위하는 세계로 만들었던 암울한 시대였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실현된 나라입니다. 누구도 소외 받거나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억압받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여, 서로가 사랑으로 섬기며, 주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타락한 세상에 편승하여 죄악의 세력과 손을 잡고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죄악된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셨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초청에 응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한 자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첫째,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1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 없었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한 사람은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둘째,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12절)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연합한 자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13절에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않아도 주님은 항상 신실하시므로 자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한 자에게 약속하신 두 가지 ‘부활의 영광’과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 것” 미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복음을 위해 고난에 참여함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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