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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인 배경과 공인 이후의 교회
백종선 2020-04-09 추천 0 댓글 0 조회 719

기독교 공인 배경과 공인 이후의 교회

 

로마는 주피터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대제국을 만들고 전 세계를 지배하게 하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로마는 갈수록 약해지기 시작했다. 로마는 주전 27년 아우구스도 이후 200년간 강력하였고 평안하였다. 이러한 평화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도덕이 헤이해지고 권위에 대한 존경은 사라졌다. 젊은이들은 군대를 회피하였고, 로마의 군대는 비시민 계층으로 형성되고 제국 밖의 야만족 가운데서 병사를 뽑아 용병으로 채워갔다. 로마 군대가 이런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제국의 권력은 군부의 손에 들어갔다. 군은 황제를 제거하기도 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기도 하면서 황제들을 자주 교체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행정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제국을 동서로 나누었다. 동제국과 서제국에 각각 뛰어난 군인들을 황제와 총독으로 두었고, 이들은 더 이상 원로원의 자문을 구하지 않고 독재를 하였다. 강력한 군대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때 기독교에 무서운 박해가 시작된다. 박해는 제국의 전역에서 이루어졌고 순교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었다. 이러한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의연하게 믿음을 지켰다. 이런 박해가 진행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황제의 명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동시에 홍역이 급속히 퍼졌다. 로마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지쳐갔고, 제국은 홍역으로 인해 유령도시처럼 변해갔다. 시체들이 거리에 뒹굴었고, 전가족이 몰살한 경우도 허다하였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숨어 지낼 때 기독교인들이 발 벗고 나서서 환자들을 돌보고 버려진 시체들을 수습하며,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때 막센티우스가 자신이 황제라고 선포하는 일이 발생했다. 두 황제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투 하루 전날 콘스탄티누스가 하늘에서 십자가 형상을 보았고, 승리하리라는 음성을 들었다.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승리를 거두었고,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선포해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기독교는 큰 변화가 시작된다. 교회는 더 이상 국가의 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동지였다. 교회는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황제는 교회를 세웠고, 성직자들에게는 봉급이 주어졌다. 교회는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고, 사람들로부터 유산을 받아 재산이 크게 불어났다. 중세에는 교회가 유럽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하였다. 교회는 큰 권한을 갖게 되었고, 법을 제정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성직자는 사회에서 국가의 관리들보다 존경을 받았다. 교회는 비싼 건물을 여러 도시에 세웠고 예술가와 건축가를 동원하여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의 날에 모든 관공서와 일터가 쉴 것을 명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었다. 국가 정치가 교회에 들어오고, 교회는 국가 정치에 관여하였다. 교인들은 전처럼 희생하지 않았고, 목숨은 커녕 시간조차 내지 않았다. 황제가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고 여기에서 이단과 이교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제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박해하는 입장이 되었다.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박해는 이전에 기독교가 당한 것처럼 혹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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