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히브리서11:23-26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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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 / 히브리서 11 : 23 ~ 26
제목 / 모세의 믿음
오늘 읽은 본문은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본문에서 보여주는 모세의 믿음은 ‘선택의 믿음’입니다.
24,25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가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더 좋아했다고 말씀합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였을 때... 모세는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 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동시에 자신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 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였을 때 두 가지의 신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인의 신분’을 선택할 것인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신분’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히브리인의 신분’입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신분’입니까?
어떤 분은 “왜 구지 선택해야 합니까? 모세는 지금까지 히브리인이면서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잘 지내왔는데 구지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고 질문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린다면...
히브리인과 애굽의 왕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며, 전혀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노예’입니다. 애굽 왕조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 하는 ‘노예의 신분’입니다. 애굽의 왕조는 히브리인을 노예로 부리면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애굽의 왕조는 히브리인에게 고역을 시키면서...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애굽 왕조의 입장에서는 히브리인은 짐승과 같이 아무렇게나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선택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굽의 왕조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이 됩니다.
모세가 ‘히브리인의 신분’을 선택한다면... ‘애굽 왕조의 신분’을 포기하는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과 같이 노예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로에서 모세는 ‘히브리인’이 되기로 선택합니다. 본문의 표현처럼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보여준 믿음의 선택입니다.
모세의 선택은...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왜 모세는 노예의 신분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히브리인’의 신분을 선택하였을까요?
앞서 질문 드렸던 바와 같이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요즘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이 우리나라의 국적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희망이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이런 병든 사회에서 살기보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돌아오는 상식적인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선택에 대하여 누구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모세의 입장이었다면... 히브리인의 신분을 선택하기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공주의 아들의 신분이 어떤 자리입니까? 부와 권력과 명예가 보장된 신분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사치와 향락, 쾌락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반면 히브리인으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히브리인의 신분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26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어떤 상을 말할까요?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실 장래의 상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상입니다. 후손들을 별과 같이 번성케 하고, 큰 민족을 이루어, 모든 민족들의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부귀와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선택이 비록 고난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라 할지라도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위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모세의 선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의 선택은.. 지금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선택입니다. 이 땅에서 주어질 상급, 명예, 부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당할 것이며,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라 부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선택하는 이유가 있다면... 순수한 도의심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모세의 선택은... 믿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믿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원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꺼이 한 알의 밀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어떤 교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애굽의 즐거움과 보화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요즘 신학계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우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번영 신학’이 신앙의 본질을 흐려놓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 되고 출세한다는 내용이 강단에서 선포됩니다. 일반 평신도들은 이런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앙을 가지는 이유를 여기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장신대의 학장과 우리 교단 총회장으로 지낸 바 있는 신학자 이종성 박사가 그가 쓴 조직신학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종교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육체적인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둘째, 영적 치유와 함께 영생을 얻기 위해서.
셋째, 현세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힘에 의존하려고 한다.
어느 나라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가 추구하는 것을 보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이를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면... 믿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종교인이 될 수 있으나... 믿음의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소망하며... 이를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그 길로 나서는 것입니다,
‘번영 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일반 종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을 동일하게 이야기하며...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물질적인 부를 누리기 위해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믿는 자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다고 선포합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핵심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신학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히브리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바로의 궁전에서 화려하게 생활하는 것이 믿음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자기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며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내세우는 자랑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복음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가 보여준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을 소망하며 이것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현재의 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번영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번영신학에 쇠뇌 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귀에는 이런 번영신학이 말하는 내용이 귀에 솔깃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은... 모세가 선택한 믿음입니다.
모세가 선택한 이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라면... 왜 구지 그 길을 선택해야 하느냐? 고난의 길을 가는 것보다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 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책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3년에 한국근대사 100년의 역사를 다룬 ‘백년전쟁’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습니다. 인터넷에서 제목을 치면 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새벽기도를 마치고 이것을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본의 침략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의 권력에 아부하며 그들의 앞잡이 노릇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그 시대에 영광을 누렸을까요? 친 일본 성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일본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모진 고난을 받았습니다. 영광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친 일본 정책을 펼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이들은 저항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찾아내어 처형하였고, 나라의 독립을 가로막았습니다. 이들의 행동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영광보다 더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그 선택의 정당성입니다. 정당하지 않는 선택은 그것이 영광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잘못된 선택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을 외면하고, 자기만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은 몰염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선택은...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힘들지라도 참된 것입니다.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간 사람은 마지막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26절의 ‘애굽의 모든 보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는 25절에서 말한 것처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머지않아 죽음의 조종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조종 소리가 “땡” 하고 울리는 순간 “애굽의 모든 보화”는 사라질 것이다. 죄악의 낙은 한 철이다. 그것이 지난 후에는 죽음과 심판이다.“
애굽의 모든 보화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듯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잠시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이런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믿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2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게벳이 모세를 낳았을 때... 요게벳은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3개월간 숨겨놓고 키웠습니다.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본문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모세를 숨기고 키운 것은... 자식을 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만은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스테이온’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보는 순간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숨겨놓고 키웠습니다.
모세는 이 믿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요게벳은 나중에 모세의 유모로 왕궁에 들어가서 모세를 키웁니다. 이 때 요게벳은 모세에게 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르치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는 사람임을 가르쳤을 겁니다.
모세는 이러한 부모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27절을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 그의 부모님과 같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히브리인이 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부모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따를 수 있는 이 믿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로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보여주는 믿음의 삶이 자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모세의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 믿음을 물려주어 믿음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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