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히브리서11:13-16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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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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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히브리서 11 : 13 ~ 16
제목 / 믿음의 사람들 6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유대민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입니다.
로마서 4장을 보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그 시점이 언제인지를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할례를 받기 이후가 아니라 이전입니다. 이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 는 할례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준이 됩니다. 할례를 받든 받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할례를 받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참 후손은 유대민족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다면...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본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존 머리’라는 주석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은 종대로 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횡대가 아니라 종대로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앞뒤좌우로 곧게 줄을 맞추고, 그 줄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행진을 합니다. 앞으로 가, 뒤로 돌아 가, 좌로 향해 가, 우로 향해 가... 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이 훈련을 할 때 횡대, 종대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횡대’는 옆으로 줄을 맞추어 서는 것을 말하고, ‘종대’는 앞뒤로 줄을 맞추어 서는 것을 말합니다.
1열 횡대하면... 한 줄로 옆으로 길게 서야 합니다.
1열 종대하면... 한 줄로 뒤로 길게 서야 합니다.
‘존 머리’가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횡대가 아니라 종대로 행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횡대로 가면 발자취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종대로 가야 앞에서 간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이 아브라함이 걸어간 믿음의 길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여정을 중요시 하지 않고, 마지막 종착지에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마지막에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믿음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은 천국의 종착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면... 아브라함이 간 믿음의 여정을 잘 살펴서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일생을 사는 동안 어떤 믿음의 길을 걸어갔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들의 생전에 받지 못하였습니다.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실망스럽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불쌍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내 생애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생의 것을 넘어 영원한 것을 바라봅니다. 하늘의 것을 생각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갈등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살고 싶은 마음과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시간적으로 자유롭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무입니다.
이 둘을 다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 즐거움과 풍요를 누리려고 하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헌신과 봉사의 생활을 하려면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풍요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풍요와 즐거움보다는 사명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이 땅에서의 삶은 잠깐 이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즐거움과 풍요를 위해 영원한 것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명의 길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여 더 좋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유원지에 가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계곡의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화토를 치며,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춥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잔뜩 남아 있습니다.
한 부류는 나무를 심고, 쓰레기를 수거하며 환경을 깨끗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땀 흘리며 수고를 하지만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더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떤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떤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이 더 좋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즐거움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술 먹고 춤추고 놀아야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낙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깨끗이 하고 가꾸는 일이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하며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있지만...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추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며 이를 위해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마지막 날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십니다. 이 때 세상 즐거움에 취해 산 사람들은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사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큰 상급을 받고 영원한 기쁨에 참여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세상 사람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았던 옛 시절, 자기가 이룬 업적을 생각하며 그 때를 그리워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거하게 될 영원한 나라,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죽음은 인생이 끝나는 마지막 막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문답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 가운데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의 때까지 무덤에서 쉰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죽음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무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육신의 옷을 세탁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 몸을 담그는 욕탕입니다. 죽음 그것은 우리가 불멸의 옷을 입기 위해 기다리는 대기실입니다. 에스더가 그랬듯이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하도록 향유로 몸을 씻는 장소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23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죽음을 앞두고 헷 족속으로부터 헤브론에 가서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산 이유는 자신이 죽었을 때 매장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가 고향에다가 매장지를 구입하지 않고, 헤브론에 땅을 구입한 것은... 장차 헤브론이 있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후손들이 차지할 땅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향을 향해 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13절 하반절 ~ 16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살았는데... 이들이 이렇게 산 것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는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외국인’이란? 헬라어로 ‘크세노이(Xenoi)’입니다. 외부인을 경멸시하며 부르는 호칭입니다.
‘나그네’는 헬러어로 ‘파레피데모이(parepidemoi)’입니다. 체류자라는 말입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믿음의 사람들이 외국인과 같이 나그네와처럼 산 이유가 무엇인지 14절에서 말합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리고 15절을 보면....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떠나온 본향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본향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본향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하늘 본향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나온 고향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아야 할 곳은 하늘 본향입니다.
하늘 본향은 믿음의 사람들이 머무를 영원한 거처입니다. 16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늘 본향입니다.
하늘 본향이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을 바라보지 않고,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고기와 생선과 채소를 먹은 것을 생각하며 불평하다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하늘 본향이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이 빼앗기면... 하늘 본향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1899년에 미국에서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이 죽었습니다.
‘로버트 잉거솔’ 이라는 사람과 ‘드와이트 무디’ 목사입니다.
‘로버트 잉거솔’은 미국 대령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그의 명석함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내세워 기독교를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오랫동안 장례를 치르지를 못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충격이었고, 비극이었습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죽음이 다가올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린다. 하나님이 부르신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아버지가 꿈을 꾸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아버지 꿈 꾸시는 거예요? 하고 확인하자... “아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나는 문들 사이에 있다. 골짜기가 없어. 행복하구나. 영광스럽구나.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야 나는 이 날을 고대해 왔단다” 라는 말을 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무디가 천국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승리와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천국환송식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언젠가 떠나야 합니다. 이곳을 본향으로 생각하며 산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죽음의 순간이 가장 감격스럽게 영광스러운 순간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은... 본향을 바라보며 본향을 향해 가는 믿음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만날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부탁하신 사명을 담당 합니다.
아브라함이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영원한 본향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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