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1-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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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생명의 빛
성경 / 요한복음 1 : 1 ~ 5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아주 민감한 주제였으며 이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메시아를 대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문제 삼아 신성 모독죄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이원론전 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정신은 고귀하고 물질은 천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요20:31절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요한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밝히기 위해서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선재성입니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영원전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자존자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전부터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에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따로 분리되어 계시지 않고, 함께 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구분되는 독립된 인격을 갖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를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분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독립된 인격으로 함께 계셨습니다. 성부, 성자로서 구분되는 위격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함께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창조성입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모든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없이 된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의 주체가 성부 하나님 뿐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도 창조의 주체가 되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만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모든 만물을 지으신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분이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로고스’입니다. 1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당시 사회에서는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익숙하게 사용되던 헬라 철학 용어입니다. 헬라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는 ‘자연의 질서 및 조화가 유지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의미를 넣어주는 이성이며, 세계를 혼돈 대신에 질서를 만드는 원리이며, 세계를 완전한 질서 가운데서 진행하게 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힘이었습니다. ‘헬라클리투스’(Heraclitus)는 로고스를 ‘그 밑에 우주가 존속할 수 있는 질서의 원리’ 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법칙, 힘입니다. 자연법칙, 자연 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하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로고서’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모든 만물의 출처가 예수님이며,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 헬라인들이 이해하는 ‘로고스(이성)’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밝힙니다.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출처와 모든 만물을 움직이는 것이 어떤 원리, 법칙, 힘으로 이해되는 ‘이성’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자연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은 그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그 법칙이 모든 만물을 생성하고, 운행하고, 생명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에 의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까? 자연법칙으로 인해 이 광대한 우주가 탄생하고, 질서 있게 움직이고, 발전하고, 변화되는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자연법칙의 산물일 뿐입니다. 자연법칙을 신으로 여기고 자연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연법칙에는 도덕이 없습니다. 양심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공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연법칙을 따른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금세 혼돈 상태에 빠질 겁니다. 인간은 비도덕적인 존재가 되고, 동물적 본능으로 행동할 겁니다. 파괴와 폭행이 일어나고 온갖 범죄가 범람하여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은 위기를 초래합니다. 자연법칙은 질서를 세우지 못하고 카오스(혼돈)를 초래합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만약 인류가 자연법칙을 따라 살았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겁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키고, 나이가 들어 약해지면 강자에 의해 삼킴을 당하는 그런 비참한 모습으로 살았을 겁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생성하고 운행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아름다운 자연을 연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도덕적 인간, 인격이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며, 의(義)를 행하고, 선(善)을 베풀며, 행복을 추구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진리 안에 거하며, 영생을 얻고,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갑니다. 육신의 본능대로 행하며 온갖 죄를 범합니다. 불행을 초래합니다. 혼돈에 빠집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창조가 나옵니다.
1:2절을 보면 빛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땅이 혼돈하였습니다. 세상이 공허했습니다. 암흑의 세계였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암흑’ 이것이 창조가 있기 전의 상태입니다.
이러했던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밝고, 질서가 있는 아름다운 세계, 행복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할만큼 완전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했던 세상이 언제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까?
인간의 범죄 이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고자 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이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는 파괴되고, 혼돈에 빠집니다. 저주스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혼돈에 빠진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창조의 능력이 있고, 모든 만물을 정상적으로 회복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타락하여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 생명이 어떤 생명입니까? 예수님에게 있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관리하며 각종 동식물을 다스렸습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입니다. 최고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잃어버려 기쁨과 행복을 상실하고 저주스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고,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같은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을 밝혀서 무지에서 깨어나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되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나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진품과 가품을 분별하는 감별사가 있습니다. 이들은 보석이나 미술품, 골동품을 보고 진위를 가려냅니다. 이를 가리는 눈이 없으면 진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가품을 진품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삶의 목적 상실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생존과 물질적인 성공을 위하여 살아가지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공을 이루어도 공허함을 느낍니다.
도덕적 기준의 혼란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지 현명하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갇히거나, 사회의 유행이나 타인의 시선에 따라 행동합니다. 바른 기준이 없습니다.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합니다. 양심의 가책과 심리적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관계의 단절입니다. 타인과의 깊은 공감과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사랑, 용서, 친밀한 관계와 같은 영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에 피상적인 관계만을 맺게 됩니다. 그 결과 고립감과 외로움에 처하게 됩니다.
영적인 눈을 뜰 때 예수님을 발견하여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소중한 가치를 분별하고, 목적 있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값진 인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려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생명의 빛이 임할 때 무지에서 벗어나게 되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 거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생의 길로 갑니다.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을 힘써 알고자 해야 합니다. 겉핥기식으로 예수님을 알고 넘어가면 예수님의 진가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힘써야 합니다. 사복음서를 비롯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자세하게 알고자 연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를 때 영적인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발견합니다.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외면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인 눈을 떠서 영생의 길을 갈 수 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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