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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없는 사랑 (요한일서4:16~21)
백종선 2025-07-13 추천 0 댓글 0 조회 23
[성경본문] 요한Ⅰ서4:16-21 개역개정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두려움이 없는 사랑

성경 / 요한일서 4 : 16 ~ 21

 

우리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 하나가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불안이 아이가 엄마의 태에서 나오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엄마의 탯속에 있던 아이가 출산과 함께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면서 분리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유대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작품들에는 불안이라는 개념이 그 근저에 흐르고 있습니다. ‘불안을 삶의 본질이자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조건임을 그의 작품에서 보여줍니다. 그는 불안을 심리적인 감정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 사회의 본질로 봅니다.

카프카가 보는 세계는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가득합니다. 인간 소외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권력 시스템에 의해 조종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인간은 도구화되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살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살다 보면 인생의 무상함과 회의를 느끼고,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이 불안한 상황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불안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까? 아니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입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낀 때가 언제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후 가인은 자신이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유리하는 자로 살아야 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일 것이라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죄책감, 수치심을 갖게 되며,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왜 두려워하는 자가 형벌이 받습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아와 같습니다. 부모님을 믿지 못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아이는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멀리합니다. 부모에게 저항합니다. 심지어는 가출하기도 합니다. 그 인생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근심과 염려를 혼자 감당해야 하므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두려움을 이기는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18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성을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합니다.

 

누구와 함께 할 때 평안하고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과 있을 때 불안하고 두려움이 있습니까? 미워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 흉악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불안하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과 함께하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모든 관계는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배려하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함께 마음을 나누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만날수록 좋습니다. 함께할수록 행복합니다. 반대로 무시하고, 하대하고, 권위적으로 대하고, 퉁명스럽게 대하면 관계가 좋아질 수 없습니다. 안 좋은 감정이 쌓입니다. 함께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관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미워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증오하던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무시하던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대하던 사람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안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사랑을 잃어버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이건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케 하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17장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사장 기도를 드린 내용이 나옵니다. 이 기도 내용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해 달라(23)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백성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복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하며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비인격적으로 대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이들 중에 애정을 가지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인격적인 관계로 만나기보다는 경제적 필요를 위해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유대인 종교 철학자로 잘 알려진 마틴 부버는 이러한 관계를 ‘ich und es’라고 하였습니다. 영어로는 ‘I and it’ 한글로 표현하는 나와 그것입니다. 인격적인 나와 너의 만남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나와 그것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비인격적인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필요하면 만나고,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인간을 도구화합니다.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이익을 위해 속이기도 합니다. 약자를 착취합니다. 협박도 합니다.

인간관계가 이런 식으로 형성되면 비인격적인 사회, 비도덕적인 사회가 되어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불행을 겪는 사람이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진단해 보면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사회가 아니라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길 원하십니다.

깨어진 인간 관계, 뒤틀린 인간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쁜 감정이 쌓여 있는 것을 제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미움과 증오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랑하고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이었을 때, 아무런 힘이 없는 연약한 자이었을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의 존재가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존재가 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합니다. 성령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거듭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생명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요일4:7절을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원수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하셨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 계명을 따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냉혹하고 삭막합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벼랑 끝에 서 있어도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고독사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독사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 질병을 앓다가, 혼자 굶주리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작년 한 해에 3,661명이었습니다.

또한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자살한 사람은 이보다 더 많습니다. 작년에 14,439명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OECD국가 평균보다 2.5배나 됩니다.

이와 같은 통계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냉혹하고 삭막한지를 보여줍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기 살길만 찾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살벌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회악이 존재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사악한 집단들에 의해 자행되는 횡포가 있습니다. 자신들은 특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며 살면서 힘없는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합니다. 다른 사람의 수고와 땀을 흘려 만든 열매를 가로채는 식으로 자기 배를 불립니다. 누구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치고, 누가 문제를 제기하기라도 하면 누명을 씌워서라도 사회에서 매장시킵니다. 사회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그냥 방관하면 사회악으로 인해 겪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불씨가 되어 사랑하면 사막에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쫓고, 평화의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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