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5:14-1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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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자기 부인
성경 / 고린도후서 5 : 14 ~ 15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고후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거듭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이전과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근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이전과 달라진 게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자기만 알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재물을 좋아하고, 탐욕을 부리며, 이익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고 다투며 차지하려 합니다. 이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잘못되면 자신의 믿음이 헛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익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 문제에 놓여 있는 분은 없습니까? 내 삶의 변화가 없고, 신앙의 유익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오늘 말씀을 잘 듣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참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영접하는 것’과 ‘믿는 것’을 동격으로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16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더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를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이버지시니라” 하시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하며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참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며, 교회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근본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갈2:20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나는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합니다. 과거의 바울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이후에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이제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바울 안에 내주하신 예수님을 따라 삽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의 삶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면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는 나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내 중심에 좌정하셔서 나를 움직이십니다. 그러니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였으면 그 순간부터 우리 삶이 180도 완전히 바뀔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어떤 마음을 소유하고 계신지, 어떤 비전을 갖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아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를 모르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도 예수님을 모르면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면 예수님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고, 어떤 일을 이루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지며 친밀해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뜻을 따를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만큼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였음에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self denial)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 ‘자기 우상’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둡니다.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자기 입장에서 합니다. 어떤 선택이 내게 유리한가? 어떤 선택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며 판단합니다.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시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의 조명을 받아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 깨닫습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자신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진리의 빛이 자신을 비추면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만이 의로우시고 온전하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참사랑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은 오직 의로우시고 온전하신 예수님을 따를 때만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달을 때 왜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예수님만 따라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은 옛사람, 육신의 사람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 육신의 사람이 죽을 때 ‘자기 부인’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 중반절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나이가 들었거나 병에 걸렸거나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롬6: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죄의 몸이 죽어야 죄의 종노릇 하지 아니합니다. 죄의 몸이 죽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이유를 말씀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하여 삽니다.
롬14: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였습니다. 거듭난 구원의 백성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주님을 위하여 삽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가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기 부인의 전제”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께 드려진 산 제물입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 일터에는 물론, 집안에 있을 수도 있고, 교회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품는 생각은 미움과 증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선대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듣는 것으로 그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옳습니다. 내가 틀렸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도우셔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부부간에도 이기적인 태도로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를 위하여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자신을 넘어서야 합니다. 주께 하듯 남편에게 순종하고,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 할 때 우리의 신앙이 관념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행함이 있는 실재적인 신앙이 됩니다. 피상적인 신앙에 머물지 않고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 부인’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가능합니다. 갈5:1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하였습니다. 욕체의 소욕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를 때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도우셔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자기 부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16:2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십자가를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면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제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하려 합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구원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영적 기쁨과 구원의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를수록 우리 마음에 영적 기쁨이 넘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경험하는 영적 기쁨입니다.
참되고 깊은 성품의 변화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를 때 심령의 변화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됩니다.
‘자기 부인’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자기 부인’을 하는 사람은 갈수록 그의 삶이 향기롭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갈수록 고집불통이 되어가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주신 말씀을 명심하고 이제 이후로 이기적인 자아로 살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변화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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