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전서2:1-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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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
성경 / 고린도전서 2 : 1 ~ 5
엔도 슈사코가 쓴 ‘침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로 천주교가 일본에 들어가서 선교할 때 겪었던 일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신부 ‘로돌리코’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합니다. 자기의 영적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 선교사로 가서 극심한 박해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분이었고,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사람이었기에 그분이 배교했다는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그분이 배교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들어갑니다. 일본에 들어가 은밀하게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을 만나 그들과 생활하며 미사를 집례하고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리고 스승이 있었던 곳으로 접근해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당국이 얼마나 잔인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치를 뜹니다. 시간이 지나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일본 당국에 붙잡힌 신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죽음을 택하든지, 예수님을 저주하고 배교를 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돌리코’ 신부는 일본 당국에 잡혀 투옥이 됩니다. 그때부터 핍박과 회유를 받습니다. 핍박의 강도를 점점 높이면서 예수님을 저주하면 놓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이 말에 꺾이지 않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이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의 결심은 결국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다음과 같은 선택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네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겠다고 하면 너희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일본인 신자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모두가 죽을 때까지 죽이겠다. 그러나 배신하면 일본 신자들을 죽이지 않겠다.”
‘로돌리코’ 신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일본 신자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깊은 고민 끝에 일본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저주하고 배신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로돌리코’ 신부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내가 죽어 일본 신자들을 살릴 수 있다면 명예롭게 순교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내 신앙을 지키면 일본 신자들이 죽습니다.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게 옳을까요? 누가 페레이라 신부나 로돌리코 신부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배신보다 순교를 원했지만 일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며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사명의 길을 가는 겁니다.
많은 교인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희생하셨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내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를 대신하여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 값을 지불하셨기에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님에게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또한 나를 전도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기도와 수고가 있었기에 복음을 듣고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도 복음에 빚을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진정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고전1:22~24절을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과 그리스도인을 비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못 박하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으로,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못 박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표적입니다. 헬라인들이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어 표적을 행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표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표적은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눅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서 고통 중에 있다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그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더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부자의 집에 가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해도 나사로가 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표적을 본다고 해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습니다. 표적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출애굽 1세대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가는 동안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질 못하였습니다. 표적이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헬라인(이방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헬라(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대표적인 헬라 철학자들입니다. 스토아학파라고 하는 철학자 그룹은 몇 세기 동안 헬라 사회를 주도했습니다. 지금은 철학이 인문학의 한 분야이지만 그 당시 철학은 학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철학에서 수학,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 등 모든 학문을 다루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질료가 무엇인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 세상과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지혜로운 철학자가 국가를 지배해야 하고 무지하면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혜가 있을 때 더 뛰어난 생각을 할 수 있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높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무엇보다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인간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지혜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헬라시대 철학자들이 다시 살아나 이 세상을 본다면 그들은 매우 놀랄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지혜는 이제 과거의 역사적 자료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발전한 새로운 지혜는 그들이 이해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가 이렇게 발달하였으나 그 지혜가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지혜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지혜가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1:16절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눈에는 거리끼는 것에 불과하였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압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표적도, 지혜도 아닙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가진 능력이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표적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탁월하십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 표적이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바울도 지혜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학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자랑으로 여겼던 지혜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4,5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전도할 때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는데 이는 너희 믿음을 ‘사람의 지혜’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고전1: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무엇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까?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배움에 힘써서 지혜를 높이 쌓아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깨달았던 ‘십자가의 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됨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은혜를 입으시길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귀한 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도 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은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죽은 영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죄악의 낙을 즐깁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악을 행하면서 이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내가 성공하고 내가 출세한 것을 궁극적인 기쁨으로 삼지 않고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내가 높아지고 내가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보다 어려운 이웃이 회복되고, 연약한 자가 일어서도록 이들을 섬기며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것을 기뻐합니다. 죄악의 도성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세워지는 것을 소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기쁨으로 여기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닮아 십자가의 정신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신 십자가의 길 우리도 주님과 같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며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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