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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열왕기하6:8~17)
백종선 2024-11-11 추천 0 댓글 0 조회 46
[성경본문] 열왕기하6:8-17 개역개정

8.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성경 / 열왕기하 6 : 8 ~ 17

 

인간에게는 다섯 종류의 감각이 있습니다.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입니다. 이를 오감이라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감각 정도가 다릅니다.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감각 기능은 떨어집니다.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 다 중요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을 보지 못한다면 가장 큰 불편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력은 어느 정도 되십니까? 일반적으로 좋은 시력을 가지신 분들은 1.2~1.5정도이고, 시력이 나쁜 분들은 마이너스의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시력을 가진 민족이 있습니다. 태국의 모겐족은 무려 9.0의 시력을 가지고 있고, 티벳의 유목민들은 5.0, 몽골 유목민은 4.0의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넓은 초원에서 생활하기에 멀리 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몽골의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이들의 뛰어난 시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아보았기 때문에 미리 손을 쓸 수 있어서 유리했습니다.

 

천리안(千里眼)이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천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을 뜻합니다. 중국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위서에 처음 나온 말인데, 이 책에 양일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황천이란 지방 군수로 부임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탐관오리들을 뿌리 뽑으려고 비밀리에 첩보원을 보내 이들의 근황을 살펴 비리를 적발하여 제거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 사람은 천리 밖에서 일어난 일도 다 꿰뚫어 본다하여 천리안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한 눈을 가진 엘리사에 관한 기사입니다.

아람(시리아)과 북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국력이 약한 편이었습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약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군사력을 비교한다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아람이 강하였습니다. 아람은 북이스라엘을 차지하기 위해 왕이 직접 선두 지휘하였습니다. 왕이 직접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아람의 군대가 총력전을 벌였음을 말합니다.

아람 군대가 큰 야심을 가지고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아람왕이 공격 루트를 정하고 공격에 나서면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방어막을 치고 있습니다. 장소를 바꾸어 공격을 시도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방어막을 쳐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벤하닷은 자신의 신복 중에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소집하여 누가 적과 내통하는지를 실토하라며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군대가 이를 알아차리고 방어막을 구축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미리 공격 루트를 알려주어 그곳을 방어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어떻게 아람 군대의 작전을 미리 알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에게는 적군의 동향을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군의 음모와 동향을 간파하는 눈입니다. 이 눈이 있었기에 아람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 통찰력이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의 동향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엘리사가 가지고 있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마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사야55:8,9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기뻐하시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며 만류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베드로의 행동이 옳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다고 하는데 어찌 이를 말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을 몰랐기에 예수님이 가는 길을 막는 잘못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에서 한가롭게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 때 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착하게 살면 당하기만 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고 악한지를 알고 냉철하게 대할 때는 냉철하게 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손해 보고 상처 입어 힘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악의가 없이 투명하고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김이 없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합니다. 이들을 부드럽게 대합니다.

행복한 삶의 주인공은 냉철하고, 손해 보지 않고, 송곳으로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하고, 선하고, 겸손하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친구들을 보면 학창시절에 순수하고 착했던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순수하고 착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들의 가정은 안정되어 있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복을 누리는 참된 행복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처럼 악한 마귀의 세력은 마수를 뻗치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공격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가 서로 맞서 싸우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하루도 끊이지 않고 치열하게 이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합니다. 사단의 공격을 잘 방어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이해하고, 시대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세계정세, 정치, 외교,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야가 좁으면 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을 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현명하게 대처하여 대적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세상의 동향을 살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누가 어떠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파악하여 사단의 음모를 차단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나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이익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나에게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기준에서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여 이를 지지한다면 결국은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자신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이는 비단 개인뿐만이 아니다. 국가 이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하나님의 의()보다 앞세우면 이 역시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불공정한 국제 관계를 만들어 적대관계가 형성되고, 전쟁이 발생하는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

 

모르는 것이 미덕이 아닙니다.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내가 몸 담고 있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를 주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세울 때 행복한 가정, 건강한 사회, 병들지 않는 국가, 평화로운 국제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선지자 엘리사 때문에 작전이 노출되어 번번이 실패하자 엘리사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정보를 알아낸 후 밤 중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엘리사가 머무는 도단성을 에워쌉니다. 이를 알지 못했던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밖을 보다가 적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것을 알고 놀라서 엘리사에게 보고를 합니다. 사환이 보고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며 를 두 번씩이나 한 것을 보면 그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납니다. 수많은 군사와 말과 마병이 성을 둘러싸서 도단성을 잡아 삼킬듯한 기세로 위협하고 있으니 놀랄 만도 합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넋이 나가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놀라 당황하며 보고하는 사환에게 엘리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6절입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들이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하며 사환을 안심시키려 합니다. 아람 군대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어떻게 저들보다 우리와 함께한 자가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엘리사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영적 통찰력을 통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무엇을 보았기에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하였을까요? 17절입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가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을 때 사환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군대인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거느리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악한 세력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하여 애굽의 바로 앞에 섰을 때 모세는 바로와는 상대가 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바로왕 앞에 당당히 맞서는 용기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갈렙이 장대하고 강한 아낙 자손을 보고서도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큰소리치며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용감히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도다했습니다.

 

우리는 빛의 용사로서 영적 전쟁터에서 이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빛의 용사로서 과감히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희망촌교회 교우들은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을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전고를 울릴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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