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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을 받은 자의 복된 삶
백종선 2024-04-28 추천 0 댓글 0 조회 35
[성경본문] 베드로전서3:8-12 개역개정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 부르심을 받은 자의 복된 삶

성경 / 베드로전서 3 : 8 ~ 12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평생을 어부로 산 노인이 있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으며 일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 고기를 잡지 못했느냐에 따라 생활 형편이 달라집니다. 어느 날 그의 낚싯대에 거대한 고기가 걸렸습니다. 사흘간의 사투 끝에 대어를 잡아 항구로 돌아오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상어 떼가 달려들어 고기를 노립니다. 노인은 상어 떼와 사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항구에 도착했을 때 상어떼의 공격을 받은 고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이 소설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물고기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물고기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 대어를 낚은 어부가 고기를 배에 매달고 돌아오면서 한 말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일하기 위해 사는 건지, 나와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일에 매여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다다 자신의 건강을 지키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할 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노인은 사투를 벌일 끝에 고기를 항구까지 가지고 왔으나 앙상한 뼈만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무리하면서까지 열심히 살아왔는데 지나고 보면 이루어놓은 건 없습니다.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건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을 볼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고, 착취하는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풍요롭게 삽니다. 목에 힘을 주고 설치며 다닙니다. 그러면서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신학에서 신정론을 배웁니다. ‘신정론이란?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왜 이 세상에 악이 들끓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신정론과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데 왜 악인들이 형통한가? 이들은 교만하고, 포악하고, 악하게 말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사람을 능욕한다. 그런데 이들의 소득은 넘치고, 강건하고, 평안하고, 죽을 때까지 고통도 없다. 나는 이를 보고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죄를 짓지 않고 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으며 징벌을 받는 자처럼 살아간다.” 며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통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악인들이 형통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들은 힘들게 사는 것을 보면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이가 들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면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깨닫게 될 때 고민이 시작됩니다. “착하게만 살면 지금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도 착하게 살아야 하나? 아니면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악인의 편에 서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이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칩니다. 돈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도의와 윤리를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의인의 고난악인의 형통을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 이를 놓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악인의 형통을 선택하지 않고 의인의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요? 예수님과 같은 의인의 고난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를 인정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부르심을 받은 자의 복된 삶입니다. 본문 9절 중반절부터 보면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며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일까요? 8,9절입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복의 통로로 되도록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통해 이 세상에 복이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밝힙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12:2,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복의 통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송 가운데 축복의 통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우리는 축복의 통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만의 복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에 최악이 무엇일까요? 전쟁입니다. 자신이 이익을 얻고자 다른 국민을 짓밟고 죽이고 약탈합니다. 전쟁만큼 쉽게 큰 이익을 챙기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침략을 받은 국가의 국민은 엄청난 비극을 겪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떨고,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부상을 당하고..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합니다. 이웃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동족에 대해서는 악을 행하지 않을까요?

전쟁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반대급부로 자기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지옥처럼 만드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축복의 통로와는 정반대로 불행의 씨앗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험악해지고, 비정한 사회가 되고, 지옥과 같은 곳이 됩니다. 자신만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이 세상은 지옥과 같은 곳이 됩니다. 하지만 이웃의 행복을 위해 축복의 통로가 되면 이 세상은 천국과 같은 곳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길 원하십니다. 한 번 따라 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당신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축복의 통로인 것을 기억하고 축복의 통로로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교우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8절에서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라합니다. ‘동정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숨파떼이스입니다. ‘체휼한다’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 간에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아픔을 겪으면 함께 아파하고, 누가 슬픔을 당하면 함께 슬퍼하고, 누가 좋은 일을 만나면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함께 나눌 때 우리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관계도 멀어집니다.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되면 서로가 위로자가 되고, ‘격려자가 됩니다. 지치고 힘들고 슬플 때 누군가 내 마음을 헤아려주고 이해해 줄 때 위로가 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누군가 기뻐해주고 축하해주면 큰 격려가 됩니다. 마음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얻습니다.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함께 나눌 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합니다. 소외 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교우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9:36절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지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에 환자들을 치유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입니다. 사랑은 상한 심령을 치유합니다. 사랑하며 불쌍히 여길 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하라고 합니다. 인관 관계에서 교만은 관계를 깨뜨리지만, 겸손은 관계를 좋게 합니다. 교만하면 다른 사람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겸손하면 친구로 만듭니다. 아름다운 교우 관계를 맺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비록 사회적 지위가 높고 능력이 있어도 교회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를 화목하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악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9절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장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이 일을 하며 축복의 통로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며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위해 복을 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대할 때 그에게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에게 복이 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고, 욕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하지 말고,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반드시 몰아내어야 할 죄가 있습니다. 악한 말과 거짓말하는 죄입니다. 거짓말은 모든 악의 온상지입니다. 거짓은 악을 번식시키는 토양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여 사람을 속입니다. 좋은 목적을 두고 속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노리고 거짓을 말합니다. 불의한 권력을 탐하여 거짓을 말합니다. 악의 토양인 거짓을 버려야 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은 억울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잘못도 없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들에게 베드로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통로로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의인뿐만 아니라 악인에 대해서도 선으로 대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앞에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을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축복의 통로인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악인의 형통입니까? ‘의인의 고난입니까? 이 세상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지만 축복의 통로인 우리는 의인의 고난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길을 선택할 때 이 세상을 복된 세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이사야 57장에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모르나 그들의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하였습니다.

하지만 의인의 길은 복됩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고난 당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갈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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