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Ⅰ서4:18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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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 / 요한일서 4 : 18
제목 / 두려움을 내어쫓는 사랑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나 두려움을 피하고 싶고,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두려움은 심적 불안을 동반합니다. 심리적인 안정감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심리를 위축시켜 부담감을 줍니다.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인공포증으로 인해 혼자서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사랑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을 실패가 두려워 아무 일도 시도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이렇듯 사람을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두려움이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자연재해의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이를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간구하면서 문명이 발달하기도 합니다. 미래와 진로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기 발전을 이루기도 합니다.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서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두려움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느냐? 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며 두려움을 이겨내면 두려움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이를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두려움은 넘어야 할 산이지 피해야 할 괴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난 파도같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의 문제를 극복하려면 두려움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불안은 인간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원시시대로부터 어떤 위기나 위험을 만났을 때 불안을 느꼈고, 이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다는 겁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두려움이 아이가 엄마의 태에서 나오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엄마와 분리되면서 ‘분리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는 현대인의 삶을 ‘불안’ 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불안의 원인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과 ‘안으로부터 오는 위협’입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 은 핵공포, 전쟁, 테러, 폭력, 범죄, 환경파괴와 같이 외부에서 오는 위협입니다. ‘안으로부터 오는 위협’ 은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기계화되고 도구화되면서 이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비롯된 존재의 무의미성,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위협입니다. 이런 외적 내적 요인이 두려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나 문학가들은 나름대로 두려움의 원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의 원인은 ‘죄’입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낀 때가 언제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그 결과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때 가인은 자신이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죄로 인한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여기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성을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두려움의 원인을 사랑의 부재에서 찾습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사랑 안에서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다고 합니다.
죄는 사랑을 파괴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에 미혹되어 선악과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저버리고, 하나님처럼 높아지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 머물 수 없어 쫓겨나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도 죄의 책임을 전가시키며 하나됨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두려움을 몰고 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그들이 보고한 내용을 듣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정탐꾼 중에 10명이 가나안에는 높은 성벽이 있고, 거기에 사는 아낙 자손은 몸집이 큰 거인들이이서 그들에 비하여 우리는 메뚜기와 같아 그들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하자 이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꺾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고 애굽 군대의 손에서 구원하신 홍해도하사건을 압니다. 아말렉이 기습공격을 했을 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압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면서도 가나안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두려워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리라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가나안에 데리고 와서 가나안 족속들의 손에 자신들을 죽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46:1~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내가 환난을 만났을 때, 위기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형별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확신하는 못하는 사람에게는 형벌이 따릅니다.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원망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사랑하는 희망촌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여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죄의 속성은 교만과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기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겁니다.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관계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소외시키며 자신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면서 더욱 깊은 고독 속에 빠져듭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고립된 채 살아갑니다. 이 상태가 되면 소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냉혹하고 삭막합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벼랑 끝에 서 있어도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지 않습니다.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문제가 ‘고독사’입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작년에 고독사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36명입니다. 최근 3년 사이 40% 급증하였고,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죽어도 모릅니다.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생존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노후 대책이 안 되어 있으면 정말 고독하고 힘든 노후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해 겪게 되는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두려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돈에서 찾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을 돈의 결핍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삶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읍니다. 돈은 빈곤의 문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처방전이 될 수는 있으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부간의 관계가 깨어지고, 가족이 원수가 되다시피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세계의 유명 건축물들 중에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졌고, 만리장성은 중국 황제의 정치적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들은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으나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돈이 많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는 한 불안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해 겪게 되는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에 있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나되어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너가 없는 나는 불완전하고 두려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막혔던 벽을 제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관계의 단절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이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내 생명만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을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사랑을 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썩어지는 한 알의 씨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사랑할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은 삶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사람을 잃고 행복도 잃고 고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메마른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서 홀로 눈물지으며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가족 중에 외롭게 살아가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 교우들 중에 소외된 채 홀로 살아가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의 이웃 중에 의지할 곳 없어 쓸쓸하게 지내는 분은 없습니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줄 때 그들은 살아갈 용기를 되찾고,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아 이 세상이 환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불씨가 되어 우리를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주시고, 아픔을 어루만지시며 위로하여 주시고, 지친 영혼을 회복시켜 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불씨가 되어 이웃들의 좋은 친구가 될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웃음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사랑의 불씨가 되어 두려움을 몰아내고 세상을 아름답게,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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