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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새벽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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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2:54~71
백종선 2026.4.1 조회 3

[성경본문] 누가복음22 : 54 - 71 | 개역개정

  •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본문 / 누가복음 22 : 54 ~ 71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대제사장이 보낸 자들의 손에 연행되어 가셨다. 예수님이 연행되어 간 곳은 대제사장의 관저이다. 예수님이 연행되어 갈 때 베드로는 멀리서 따라간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이들은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 주변에 모여 있었고, 베드로도 그들 중에 섞여 앉았다. 베드로가 앉았을 때 한 여종이 불빛에 비친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하며 부인한다.

조금 후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그 도당이라하자, 이번에도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라하며 부인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도다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하며 부인한다.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다. 그 순간 닭이 울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 바깥으로 나가 심히 통곡한다.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 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모습에서 실망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베드로를 통해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우리도 입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상대방이 내가 교인인 것을 모를 때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처신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교인임을 밝히는 것이 유리할 것 같으면 밝히고 불리할 것 같으면 숨긴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이 예고한 대로 닭이 세 번 울었고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통곡하며 울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을 하였을 경우 말씀을 통해서나 양심을 통해서 잘못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사수해야 하는 것이 있다. 신앙 양심이다.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그대로 두면 영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딤전4:2절에서 양심이 화인 맞으면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위선적인 신앙으로 변질된다. 또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의 담이 쌓이게 되어 아담이 범죄 후 숨었던 것처럼, 신앙생활이 기쁨이 아니라 불편함이 된다.

집안에 더러운 오물이 있으면 깨끗이 청소한다. 그대로 두면 냄새나고, 유쾌하지 않다. 집안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을 때 마음도 상쾌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우리의 영혼도 깨끗함을 유지해야 한다. 성령이 말씀 또는 양심을 통해 깨우쳐 주실 때 뉘우치고 회개하면 우리 양심이 자유함을 얻고, 믿음이 더욱 강화된다.

요일3:21절에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하였다. 영혼을 깨끗이 하여 양심의 자유함을 얻으면 담대함을 얻어 기도의 문이 열리고,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다.

이번 고난주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정결하게 되어 양심의 자유함을 얻고, 영적인 담대함을 얻어 기도가 회복되고, 기쁨이 회복되고, 사명을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

 

66~71절은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이다. 날이 새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에 예수님을 데려와 심문한다.

먼저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진술할 기회를 준다. 예수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다. 그러자 산헤드린은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신성을 모독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다고 하며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다.

산헤드린의 오만함을 본다. 그들은 재판권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이 모든 것의 잣대가 되는 양 행세한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빌미를 찾기 위해 심문을 하고 있다. 그들을 결론을 내려놓고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재판을 진행할 뿐이다.

 

산헤드린 재판의 가장 큰 모순은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심판의 주이신 예수님을 심판한다는 사실이다. 심판받아야 할 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듯이 이들은 성전을 백성을 강탈하는 소굴로 만들었다. 바로 이들이 재판권을 쥐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재판하며 처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관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모르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런 횡포를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백보좌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20:11절 이하에서 백보좌 심판에 대하여 말씀한다. 요한이 환상 중에 하나님이 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본다. 그 앞에 책들이 펼쳐져 있다. ‘생명책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여기서 불의한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한다고 해서 부인되는 게 아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한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이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이를 의식할 때 죄와 불의를 멀리하고, 의인의 길을 갈 수 있다. 의인을 길을 갈 때 진리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63~65절을 보면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린다. 여기서 지키는 사람들은 대제사장에게 속한 하속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신변을 인계받은 후 예수님에게 인격 모독적인 행동을 한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예수님을 때린 후에 예수님에게 선지자 노릇하라 하며 때린 자를 찾아보라는 식으로 장난을 친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에게 많은 욕을 퍼붓기까지 한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희롱하며 욕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예수님의 침묵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53:7절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말씀한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침묵하셨다. 예수님의 침묵은 겸손한 순종을 의미한다. 이 길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이기에 희롱을 당하고 매를 맞고 욕설을 들어도 침묵하시며 묵묵히 그 길을 가셨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하실 때는 입을 열어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하시며 자신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다.

이 역시 예수님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장차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심판의 주이심을 밝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면 신성 모독죄로 몰려 형벌을 받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이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도 침묵할 때와 입을 열어 말할 때를 구별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을 당하고, 옥에도 갇히고, 돌에 맞는 일도 있었으나 이들과 맞서 싸우는 데 자신의 힘을 소진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리도 불필요한 일에 엮여서 힘을 소진하기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담대히 입을 열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 분별력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침묵하고, 불필요한 말만 하다가 시간을 다 소진하고 인생을 끝낼 수 있다.

예수님은 구원의 사역에 집중하셨다. 우리 역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다른 사람과 감정이 엮여서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구원의 사역에 집중하신 것처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귀한 인생을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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