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9:14~23
- 백종선 2025.12.12 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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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9 : 14 - 23 | 개역개정
-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본문 / 로마서 9 : 14 ~ 23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과 섭리에 대하여 말한다.
바울은 앞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언약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모두 언약의 백성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두고 혹자는 하나님의 선택적인 부르심은 잘못되었고 불의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럴 수 없다고 단정 지어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의로우시며 불의한 일을 하지 않는다.
15절에서 바울은 모세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출33:19절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말한다.
16절에서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인간의 원함이나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해할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께 왜 나를 심판하시느냐고 항의할 수 없다. 인간이 범한 죄 때문에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항의할 수 없다. 이런 운명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이삭을 택하셨고, 야곱을 택하셨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의 후손들을 지파로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하게 하셨다.
여기에 대하여 누가 항의할 수 있나? “왜 우리를 선택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을 수 있느냐? 이는 공평하지 않다. 이건 의롭지 못하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거다. 이들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누가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나?
17절에서 ‘바로’를 언급한다. 출애굽기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나에게 보내라”고 했을 때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다. 출7:13절을 보면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고 한다. 바로가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그대로 두셨다. 이를 유기(遺棄)라 한다.
17절을 보면 출9:16절 말씀을 인용하며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한다.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유기하여 10가지 재앙이 내리게 되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이를 두고 하나님이 불의하다 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고된 노동을 시키며 자기 영광을 누렸던 바로를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어,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불의라 할 수 없다.
18절에서 결론적으로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완악한 자를 유기하기도 하신다. 바울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보여준다.
19~21절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반문하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하여 답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을 말한다.
19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을 두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인에 대하여 어떻게 허물을 물으시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 며 반문한다.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20,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바울은 여기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들어 답한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으로 비유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이야기한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다. 어떤 그릇으로 만드느냐는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주권자이시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 수도 있고, 완악한 대로 유기할 수도 있다. 이를 가지고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다.
22,23절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완악한 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다. 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참고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관용이다. 이는 그들의 멸망이 그들의 완악함과 회개치 아니함 때문이었음을 밝힌다.
동시에,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푼 자들에게 영생과 영원한 유업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알게 하셔서,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의롭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고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불의하다고 항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심판하신 자를 심판하시며, 긍휼을 베푸실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이 드러난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되었다. 구원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셨음에도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억지로 돌이키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며 기다리신다.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을 무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없다.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고집을 부렸으나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완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항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그대로 진행된다.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섭리를 성취하신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구원 섭리가 선택적이어서 문제가 있고 불의하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은혜를 거부한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하나님은 정하신 구원 섭리를 성취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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