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 (로마서3:21~26)
- 백종선 2025.3.10 조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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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3 : 21 - 26 | 개역개정
-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제목 /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義)
성경 / 로마서 3 : 21 ~ 26
인간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지난 주 공부했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9문에서 사람이 죄를 범하여 타락한 결과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타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이생에서 온갖 비참함 속에서 지내다가 죽고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타락한 인간은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고, 비방하고, 수군수군하고, 능욕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도모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배약하고, 부정하고, 무자비합니다. 그 결과 파멸과 고생이 있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여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습니다.
롬2:5절에서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고 하였습니다. 2:9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죄악 가운데 사는 인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광스런 모습을 잃어버리고, 어둠에 속한 일을 더 좋아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 헛된 일을 도모하며 온갖 죄악을 범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비극에 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문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가지신 영광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광을 말합니다. (인간은 범죄하기 이전에도 하나님이 가지신 영광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귐이 가능하게 하셨는데 이 영광을 말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이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었던 거룩함, 사랑, 의로움을 상실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영광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어리석게 되어 썩어서 없어질 사람과 짐승을 숭배하고, 피조물인 해와 달, 나무와 같은 자연을 숭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납니다. 21,22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의(義)를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의(義)’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고, 언약 백성들에게 이 법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법을 따라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분별력을 잃어 무엇이 의롭고 거룩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구별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가진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무엇이 의(義)이고 무엇이 악(惡)인지 알 수 있지만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지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문 앞의 20절을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율법을 지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타종교에서도 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그것이 죄를 상쇄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선을 행하면 죄를 상쇄할 수 있을까요? 선을 행한다고 하여 죄를 상쇄할 수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아무리 잘 지켜도 한 번 법규를 어기면 벌금이 나옵니다. 백번 법규를 잘 지켰다고 해서 벌금을 면할 수 없습니다. 고통 법규를 잘 지키는 것은 기본입니다.
약2:10절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하였습니다. 모든 율법을 잘 지켰더라도 하나를 범하면 그는 법을 어긴 자가 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죄인지도 모를 때는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롭게 살려고 하면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약한지 알게 됩니다. 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나는 율법에 있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의 의(義)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의(義)는 22절에 나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죄인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운명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속량’이란 말이 나옵니다. ‘속량(贖良)’이 무슨 뜻일까요?
예전에 신분 제도가 있을 때 종이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려면 몸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값을 지불하여 건져주는 것이 속량(贖良)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에 사로잡혀 의(義)를 행하지 못하고 죄의 종노릇하며 마귀가 시키는 대로 온갖 죄를 범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온갖 죄를 범하며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고생과 파멸의 길을 가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운명에 놓여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속전을 지불하셔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종의 값은 돈으로 지불하면 되지만, 죄의 종은 죄의 값인 생명을 지불해야 하기에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값을 자기 생명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엡2: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엡2:4,5절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본문 26절에서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義)입니다. 예수님은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며 이를 경계한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義)가 어떤 문제가 있길래 주의하라 하셨을까요?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세세한 조항까지 만들었습니다. 율법을 613개의 조항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 248개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계명 365개로 분류하여 이를 지키려고 하였고 후에는 세부 조항까지 더해져서 2000개가 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가장 큰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달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의로 자기를 자랑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킨 것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공로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선이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음에도 자신이 마치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독특한 행동을 합니다. 마23:5~7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 하였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의 의(義)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아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율법의 잣대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였지만 이들이 영혼을 살린 사람이 많을까요? 죽인 사람이 많을까요?
바리새인들이 내세운 율법의 의(義)로는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 외에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인의 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나는 의롭고 당신은 악하다는 식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정죄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의(義)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義)입니다.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의(義)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義)입니다. 이 의(義)가 있을 때 죄인을 구원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폐기 처분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법입니다.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합니다.
타락한 죄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어 거듭나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정결하게 되고,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말씀을 따라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율법을 더 온전하게 지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이 가진 율법의 의(義)입니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義)입니까?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의입니까? 비난하고 정죄하는 의입니까? 사랑으로 행하는 의입니까? 사랑이 없는 칼 같은 의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義)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랑하는 희망촌교회 교우 여러분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義)’로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리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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