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듭남과 사랑 (요한일서4:7~16)
- 백종선 2025.3.3 조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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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Ⅰ서4 : 7 - 16 | 개역개정
-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제목 / 거듭남과 사랑
성경 / 요한일서 4 : 7 ~ 16
에릭 프롬이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 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심도 있게 다룹니다. 에릭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오면 경험하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현대인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갈망하며 행복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를 보고, 사랑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감상하며 사랑을 생각하지만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인간관계가 중요하지만 인간관계가 늘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잘못된 인간관계로 인해 불행을 겪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랑도 즐거운 감정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꽃을 좋아하면서도 꽃을 잘 관리하지 못해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랑이 숨 막히는 감정으로 시작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무르익지 않습니다. 배려와 예의, 희생이 없는 사랑은 구속과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음악이나 그림, 건축, 의술, 공학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듯이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려면 피아노 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에릭 프롬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를 사랑에 대한 기술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미성숙한 사랑의 대표적인 예로 사랑을 ‘사랑하기’가 아니라 ‘사랑받기’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성공하여 돈과 권력을 쥐려 합니다. 여성들은 외모를 가꾸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런 것을 갖추면 사랑이 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받는 조건은 사랑의 준비 운동에 불과합니다. 상대의 마음과 감성의 흐름을 읽는 기술,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 말로 표현되지 않는 몸짓을 읽는 기술, 배려하고 희생하는 마음, 상대를 보호하고, 책임지고, 존중하는 능동적인 활동이 필요합니다.
에릭 프롬은 사랑은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며, 사랑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라 합니다. 사랑이 감정이라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감정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강렬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강렬한 감정이 있을 때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감정이 희미해질 때는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의지’입니다. ‘감정적인 사랑’을 넘어 ‘책임 있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한평생 희생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다른 차원에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형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연결하는 이유가 뭘까요?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연결할까요? 본문에서 이를 설명합니다.
본문 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하여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절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이 곧 사랑이심을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 사랑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해와 달 별과 땅과 바다, 식물과 동물,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 영혼, 사랑, 성품, 인격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고전15:40,41절에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광이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하늘의 영광이 있고, 땅의 영광이 있고,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각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에게 주신 영광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영광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영광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이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사랑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온전한 사랑을 할 줄 모르고,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변질되어 사랑이 욕망으로 바뀌었고,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려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사랑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깨우쳐주시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사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 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은 자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9,10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다”고 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가 불의하고 경건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연약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원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과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사랑하려 합니다. 얼굴이 잘 생겼을 때, 성격이 좋을 때, 능력이 있을 때,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을 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모두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생기고, 편을 가르고, 분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평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나중에 자기밖에 남지 않습니다. 원하는 사랑의 조건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변합니다. 형편이 달라집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큽니다. 조건들이 변하면서 사랑도 깨어집니다. 조건적인 인간의 사랑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피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선행하시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피동적으로 반응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한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피동적으로 반응하면 누구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처럼 선행적으로 다가갈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관심을 보이고,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창조입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짓듯이 만들어가는 겁니다. 사랑의 수고를 할 때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 본문을 강해하며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게 마땅하듯이, 새가 하늘을 나는 게 마땅하듯이, 레몬이 신 게 마땅하듯이 거듭난 사람은 사랑하는 게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앞의 7,8절에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요일3:14절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는지, 사망에 머물러 있는지는 형제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일3:11절에서 가인을 언급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유를 말합니다. 자기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이게 살인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가인은 이런 이유로 아우를 살해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가인과 같은 자가 됩니다. 사랑의 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사탄의 종노릇합니다. 이들의 마음을 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죄악을 궁리하고, 손으로 이를 실행하며, 발은 죄짓는데 빠릅니다. 가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자신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에게 의가 돋보이면 이를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의 약점을 노출시켜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의 의를 폄하하고 묻어버리려 합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가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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