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19:28~44)
- 백종선 2021.3.28 조회 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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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9 : 28 - 44 | 개역개정
-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성경 / 누가복음 19 : 28 ~ 44
제목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오늘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로 이름을 붙인 이유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유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보면 여리고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종려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종려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대추야자’라고 하는데 이를 건조 시켜 가게에서 팝니다. 먹어보면 아주 달고 맛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건조하고 땅이 사막화되어 있어 식물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종려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종려나무를 잘라내고 남은 그루터기가 불에 타도 거기서 다시 싹이 나서 자란다고 합니다. 시편92:12절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종려나무는 악조건 속에서도 5m이상 잘 자랍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종려나무는 ‘의인의 번성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주전 167년경 셀류크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큰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는 안식일과 절기를 폐지하고, 구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고, 심지어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그곳에서 부정한 돼지를 제물로 바쳤고, 성창까지 두었습니다. 여기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이것이 마카비 혁명입니다. 마카비 혁명은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유다의 독립을 쟁취했는데 이때 유대인들은 마카비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종려나무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그가 메시아인 줄로 알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독립은 100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로마에 의해 정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친 것은 예수님이 유다의 승리와 독립을 가져다주실 분으로 기대하며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올라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 왔을 때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게 한 이후에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이심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당시 왕이 성을 출입할 때 말이나 나귀를 타고 행차하였습니다. 호위병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행차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자신이 왕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스가랴 9:9절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의 오심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네 왕이 네게 임하실 것이라”고 하며, 그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다른 왕들의 입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간 왕이 있었습니다. 세계 정복의 야망을 가진 왕들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무너뜨린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침략을 감행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에 바벨론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차지했습니다. 그후에는 바벨론을 무너뜨린 바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헬라와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칼과 창으로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에 칼과 창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복자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요18:3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에 대하여 진술한 내용이 나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라” 하시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나라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그리고 장차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예수님께 속할 것이며, 모든 백성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주의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다스리는 왕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主)로 왕으로 모시고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화의 왕’이심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본문 42절에서 예수님은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고 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진정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있고, 이 세상 권력자들이 만든 평화가 있습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이 만든 평화는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세상을 지배함으로 누구도 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이 세상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하는 반면 지배받는 사람들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눈물을 머금고 순응하며 침묵할 수밖에 없는 억압된 평화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진정한 평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요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이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군림하는 통치가 아닙니다. 위에서 지배하는 통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낮은 곳에서 사랑으로 섬기시는 통치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자들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낮은 곳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통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주변을 장악하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려고 해서는 평화가 임할 수 없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사랑으로 섬기려고 할 때만 참된 평화가 임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류세력은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장악하고 자기들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지난 해 11월 총선이 치러졌는데 여기서 국민민주연맹(NLD)이 83.2%의 지지를 받으며 압승을 하였습니다. 군부가 이를 뒤집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미얀마는 군부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얀마 헌법 자체가 군사 독재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75%는 시민들이 뽑고, 25%는 군부가 지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 저지선이 25%입니다. 헌법에 의하면 개혁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 안보부 장관, 국경부 장관은 군 최고 사령관이 임명하게 되어 있어 경찰도 군부의 지시를 받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군부의 통치를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며 군사 독재를 이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독재 권력이 있는 한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를 이루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힘의 평화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를 지지할 것인지를 놓고 결단해야 합니다. 힘의 평화를 지지하면 그들 밑에서 개인적인 특혜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평화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겸손하게 사랑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섬길 때 참된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샬롬의 평화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원의 주’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스가야 선지자는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구원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무리가 찬양하였습니다. 38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양합니다. 이들은 주님을 찬양하면서 ‘호산나’를 불렀는데 구약성경에서 호산나는 ‘주께 간청하오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118:15절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씀을 원어로 보면 ‘구원하소서’가 ‘호산나’로 되어 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에게 구원을 기대하였습니다. 이들이 기대한 구원은 유대가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유대 민족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를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자 실망하여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임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가 운이 나빠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형에 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친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인류가 처한 상황은 죄로 인하여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입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지은 죄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저지른 일이니 너희가 책임지라고 하며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아셨습니다.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받아야 함을 아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채찍을 맞아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자원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까? 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습니까?
사랑하면 희생합니다. 사랑하면 짐을 집니다. 사랑하면 대신 고통을 담당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우리가 철없을 때 부모님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저렇게 힘들게 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부모님을 무시하고 짜증을 낼 때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도 부모는 자녀를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힘든 삶의 무게를 지탱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셨는지 모르고, 그냥 머리로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였으니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쉽게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의 혜택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작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보면서도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지금도 동일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며,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 바라보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 안에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기를 지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며주님을 환영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오심을 환영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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