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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1:3~11)
백종선 2020.6.13 조회 1131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 : 3 - 11 | 개역개정

  •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 / 고린도후서 1 : 3 ~ 11

제목 /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출산의 과정은 산모 뿐만 아니라 태어나는 아기에게도 힘겨운 일입니다. 태어난 이후에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더위와 추위를 견디어내야 하고, 감기를 비롯해서 소화 장애, 고열, 피부질환과 같은 질병을 이겨내야 합니다. 신체적 발달과정에서도 몸을 일으키고, 서고, 걷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지적 성장을 위해 오랜 기간 배움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후로 성인이 되어서 가정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또한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을 겪게 됩니다. 건강상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 역시 많은 힘이 듭니다. 인생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과의 힘든 싸움을 해야 합니다.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을까요? 아마 오래 견디지 못하고 포기했을 겁니다. 위로는 시련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환난과 고난을 이기게 하는 힘 그것은 바로 위로입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고후1장은 위로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본문은 위로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인사말을 한 후 3절부터 본론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찬송하리로다!”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베푸신 위로의 위대함을 경험한 후,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어서 그 위로가 무엇인지를 전합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심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흩어졌지만 어디를 가나 핍박이 따랐습니다. 그 당시는 세계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종교와 로마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전쟁에 참전하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많은 제재를 당하여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생계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심한 모욕도 당하였습니다.

본문 8,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을 줄 알았으니...”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심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살 소망까지 없어져서 사형 선고를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교인들이 겪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런 힘든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그 해답을 4,5절에서 밝힙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모든 환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에 겨운 고난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 위로가 모진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위로가 과연 무엇일까요? 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혹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수 있지만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모진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승리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넘치는 위로입니다.

오래전에 젊은 감독이 만든 창작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상연시간이 10분 내외 정도 되는 짧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가 주는 감동은 매우 컸습니다. 영화에는 두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시계방을 운영하며 시계 수리하는 일을 합니다. 작업복을 입고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시계를 수리합니다. 그의 아들은 아직 철들지 않은 청년입니다. 방 안에 들어가려면 가계 안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들은 오고 가며 아버지와 마주치지만 그냥 지나칠 뿐입니다. 아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온종일 앉아 시계만 고치는 모습을 답답하게 여기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 영화는 한 가정의 단순한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며 희망을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하루 종일 자리를 뜨지 않고 시계를 수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희생하는 부모님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이 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자녀의 삶에 큰 교훈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어 험한 세상을 극복하며, 이기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 위대한 사랑,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큰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이 힘을 받고, 이 위로를 받는 사람은 어떤 시련이 오고 환난이 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기에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이 발견한 위로의 힘을 발견하고, 그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그 위로함으로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내고 있습니까?

인간의 생애는 시련과 고난과 역경의 세월입니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이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인생에는 육신의 질병, 경제적 결핍, 사업의 실패, 자녀의 문제, 부부의 갈등과 같은 수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고, 이로 인해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덕이다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고, 그 십자가가 주는 위로의 힘으로 모든 환난과 시련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합니다.

16: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을 때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감당하여 승리의 새날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예수님 개인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환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고난과 환난이 유익입니다. 바울은 롬5: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환난이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와 연단의 훈련을 쌓게 되고, 결국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헬스클럽에 가면 사람들이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런닝머신에서 걷거나 달리고, 어떤 사람은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고, 어떤 사람은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립니다. 이들의 얼굴과 몸은 땀으로 젖어있습니다. 가끔 힘들어서 내는 소리도 들립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하는 걸까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이 수고를 합니다. 이들은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운동합니다. 결과가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운동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같습니다. 힘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장합니다. 학생들은 어려운 학습 단계를 극복하며 실력이 향상됩니다. 기업도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더 견고해집니다. 시련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역경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련 때문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승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시련이 자신의 발전을 가져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환난과 시련과 고난은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환난과 시련을 잘 극복하여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발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성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4절 말씀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지 못하여 고해의 바다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로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서로 위로할 때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윤복희라는 가수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위로의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너의 기쁨이야

형제, 친구가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괴로워할 때 위로해 주고, 서러워할 때 같이 눈물 흘리고, 어둡고 험한 길 갈 때 등불이 되어주고, 허전하고 쓸쓸할 때 벗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형제이고, 친구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를 위로하고, 아내를 남편을 위로하고, 부모는 자녀를 위로하고 자녀는 부모를 위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 간에 위로함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도 동료들 간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서로가 위로자가 될 때 우리는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희망촌교회의 한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성도들 중에 괴로워하는 분이 있으면 위로하고, 서러움에 눈물 흘리는 분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외로워하는 분이 있으면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희망촌교회가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하다는 헬라어로 παρακλήσεως 파라클레수스입니다. 뜻은 곁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성령παρα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단어가 비슷합니다. ‘위로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곁에서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런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집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미국의 아주 괴팍한 여류 문학가가 있었는데 이 분은 다른 사람과 잘 접촉하지 않고 늘 집에서 글만 씁니다. 그에게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함께 여행을 갔던 친구들과 함께 그 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큰 사업을 해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각종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벗어나 여행을 가보라는 권면을 받고 여행도 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평생을 해 왔던 글 쓰는 일에 몰두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사고를 당한 아들 친구의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는 치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여 친구의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서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위로는 함께 하는 겁니다. 마음을 나누는 겁니다. 여기서 위로가 이루어집니다. 위로자가 되려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담을 쌓고 마음을 닫고 살아갑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합니다. 이런 닫힌 상태로는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마음이 열려 있습니까?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며, 같이 기뻐합니까? 혹시 마음을 닫고 냉소적인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서로 마음 문을 열고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위로자가 될 때 험난한 세상을 웃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위로의 삶으로 마음을 나누며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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