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이사야40:27-3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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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 / 이사야 40 : 27 ~ 31
제목 / 낙심치 말고 일어서라!
사람을 외관상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눈과 코와 귀와 입과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두 다리로 서서 직립 보행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질은 크게 차이납니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인류에 크게 공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계조차 염려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냅니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전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차이를 만듭니다. 자신의 인생을 값지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며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과 자신의 인생을 운에 맡기고 현재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전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값지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며 성취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은 지나온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습은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했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자연 재해의 피해를 입었거나...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서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것 때문에 낙심하고 원망하며 자포자기하면 그 인생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곤경을 당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이를 극복해보고자 인내하며 노력하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본문이 나오는 이사야 40장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들은 망연자실하여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시편137:1절을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조국을 잃어버리고 이국땅에 포로로 끌려와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 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끝이 있다면 이를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으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해야 합니다. 어제 겪었던 일을 오늘도 겪고, 오늘 겪었던 일을 내일 또 겪어야 합니다. 어제 흘렸던 눈물을 오늘도 흘려야 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27절에서 하나님은 원망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낙심되는 일을 겪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겪어야 합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일입니까?”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것이 하나님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죄를 범한 결과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누가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은 원망과 불평을 하기에 앞서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책임을 지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지금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계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고 바른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럴 때 징계가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오는 자에게 자비와 긍휼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징계를 받으면서도 뉘우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면 징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이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낙심하여 불평과 원망을 쏟아낼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 개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개선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지만 원망과 불평을 하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27절을 보면 유다 백성들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원망합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도 손쓸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력하여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사야는 28절에서 대답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의 억울함과 송사를 들어주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이 피곤해서, 고단해서, 명철이 없어서,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끝까지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며, 피곤하지 않으시고,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29절에서는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도울 힘이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과 힘을 얻는 것입니다. 자신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면 힘든 포로생활을 잘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30,31절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과 힘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다”고 합니다. ‘소년’은 원어로 ‘나아르’입니다. 유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를 말합니다. 이 시기는 힘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끓어오를 때입니다. 이런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함을 느낍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진다”고 한다. ‘장정’은 원어로 ‘바후림’입니다. 절정에 이른 때를 말합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는 신체적으로 절정기입니다. 이런 장정이라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누구도 “나는 문제없다. 나의 사전에 패배란 없다. 승리만 있을 뿐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실패하고 쓰러졌을 때 다시 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잘 훈련된 독수리는 자신보다 몸집이 큰 맹수도 사냥합니다. 독수리가 하늘을 비상하여 나는 모습을 보면 위용(威容)이 느껴집니다. 2~3m되는 날개를 펼치고 기류를 타고 까마득할 정도로 하늘 높이 올라가 유유히 하늘을 맴도는 모습을 보면 하늘의 제왕처럼 느껴집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독수리 날개 치며 높은 하늘을 비상하듯이 그와 같은 힘을 얻게 됩니다.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려면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력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무한한 능력이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무력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며, 역사의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을 성취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 힘을 얻어 새롭게 도약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그리스도의 변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할 때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이 나오고, 그림 아래에는 변화산에 오르지 않은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여 당혹해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그림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보다 영광스런 분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통하여 제자들의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귀신 들린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앙망하다’는 말은 히브리로 ‘카와’인데 위를 쳐다보며 대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을 소망할 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소망하면 그 인생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헛된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낙심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면 내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야망을 품고 있지는 않았는지, 눈에 보이는 육신의 욕망에 소망을 두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나의 소망이 같아야 합니다. 바울은 빌4:12,13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에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부(富)를 가지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궁핍했습니다. 배고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같은 뜻을 품고, 같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천에도 처하고, 배고픔을 겪고, 많은 시련을 겪었으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위대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위대한 꿈을 꾸면 힘이 납니다. 그 꿈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그 꿈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생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큰 뜻을 품으면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앙망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희망촌교회에 속한 모든 교우가 이 힘으로 다시 일어나 거룩한 소망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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